본문 바로가기

[독후감] 예술과 문화 / 예술 비평 에세이 모음집.

728x90
반응형

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예술과 문화

지은이 : 클레멘트 그린버그

옮긴이 : 조주연 번역

출판사 : 경성대학교출판부

출판일 : 2019년 06월 30일

다른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모든 가치는 인간적 가치들이며, 따라서 상대적인 가치들이다. 그렇지만 인류 가운데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무엇이 좋은 예술이고 무엇은 나쁜지에 관한 일반적 합의가 얼추 있어온 것 같다. 취미는 변해왔지만 일정한 한계 이상을 넘어서지는 않았던 것이다.

26p 아방가르드와 키치

 

 

 

예술의 탄생은 어디일까. 계급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다. 사람은 남들과 어울려야 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을 구분짓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나는 남들과 달라" 라는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계급이 등장하고,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무형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다. 오케스트라, 성악 등 클래식 음악의 등장. 주사위를 던져 술게임을 즐기던 조선시대 양반들. 예술은 계급을 구분짓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후 클래식에서 오페라로 그리고 뮤지컬로 변모했다. 클래식을 듣고 그걸 이해하거나 느낄 수 있는 교양이 없기 때문에 오페라를 택했고, 오페라를 이해 못하던 사람은 뮤지컬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나름 교양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확립했다. 취미 역시 그렇다. 적당히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향유할 수 있는 정도의 취미로 예술이 사용되었다.

 

 

 

[•••] 그러나 교양 있는 관람자가 피카소로부터 끌어내는 궁극적인 가치는 두 번째 단계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조형적인 가치들이 남긴 직접적인 인상을 반성한 결과다. 알아볼 수 있는 것, 기적적이고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때만 등장한다. 이런 것들은 피카소의 그림 안에 직접 혹은 그림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 성질들에 충분히 반응할 만큼 예민한 관객에 의해서 그림 속으로 투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반성의" 결과에 속한다.

28p 아방가르드와 키치


사르트르는 반성 후에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순간에는 몰입이란 과정 속에 글자를 담아낼 뿐이다. 이 순간에는 나는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난 뒤에 몰려오는 반성이란 과정이 뒤따라오고 비로소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예술도 그렇다. 눈과 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무"의 상태가 된다. 그 뒤에 찾아오는 여운으로 예술을 어렴풋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무의식 중에 갖고 있는 나의 가치판단과 사고가 만나 결과값이 도출된다. 어떤 재료로 사용했는지, 어떤 질감으로 그림이 표현되었는 지는 눈으로 보고 감각과 직감으로 작품을 느낀다. 감각의 과정을 거쳐 경험으로 전환될 때 나의 사고와 가치가 결합된다.

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서 "반성" 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술이 모방하는 현실이 일반인에 의해 인식되는 현실과 대강이라도 일치하지 않을 때, 미술은 일반인에게 캐비어 같은 사치품이 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조차도 보통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적개심은 그러한 예술의 후원자들에 대해 그가 품고 있는 경외감으로 인해 잠잠해진다. 보통 사람이 이런 후원자들의 문화를 비판하기 시작하는 것은 후원자들이 관리하는 사회 질서에 불만을 품게 될 때뿐이다. 그러면 평민이 용기를 내 처음으로 그의 의견을 숨김없이 토로한다.

30p 아방가르드와 키치

 
 
 

현대미술이 비판받는 이유는 점 하나 찍은 작품이 거액에 거래된다는 이유에서다. 삶은 지치고 힘들지만 그래도 계속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보통의 사람에겐, 이 상황은 그리 탐탁치 않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모자이크 기법 등 미술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바와 전혀 딴판이다. 단순히 기존의 기법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모더니즘이라 칭하기엔 난해함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미술이 확신의 원천을 찾을 때 그것은 전반적으로 사상과 동일한 방향을 취한다. 확신의 원천은 한때 종교였지만, 그 다음에는 실체화된 이성이었다. 19세기에는 확신의 원천을 구하는 추구가 경험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지난 100년 동안 경험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의 관념은 수정이 거듭되어, 일반적으로 좀 더 엄밀해지고 아마도 좀 더 좁게 변한 것 같다. 미적 감수성도 이에 따라 변화했다. 예술들은 점점 더 특화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노동 분업의 확산 때문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취미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미에 부응하기 위해서, 다양한 모더니즘 예술들은 각자에게서 가장 실증적이고 직접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려고 한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예술작품은 원리상 가장 본질적이라고 파악된 제 매체의 본성에 주어지지 않은 경험 영역에는 의존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환영 및 뻔한 명시를 포기한다는 의미다. 예술들은 각자의 개별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자아의 견지에서만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구체성, “순수성”을 획득해야 한다.

167p 새로운 조각

 

 

 

종교는 미술과 한때는 한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교의 확성기 역할로 사용되었다. 절대주의 성격을 띄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면 안 되었고,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담아내야만 했다. 조각상 역시 마찬가지다. 미술과 종교의 사이가 멀어진 뒤 이성에 기대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달은 이성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상대주의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기존 회화방식에 비판을 하며 등장한 인상주의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

문명이 고도화되면서 개인의 삶도 점차 나아졌다. 그래서 취미를 향유하는 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의 방향도 그 결도 다양해졌다. 개인의 이성이 확장되고 특수성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 하지만 공교롭게도 예술은 자기-근거 와 감정의 문제이고, 사유나 정보의 문제라기보다 감정을 추론하는 문제이며, 예술의 실재는 오직 경험에서만 드러나지,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문학에서와 못지 않게 음악에서도 형식은 주목을 사로잡고 정서를 연루시키는 응집성(coherence)을 통해서 실재적인 것이 되며, 그러한 응집성에 의해서 무한히 나눌 수 있는 많은 순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지며 나아가는 것이다.

문학, T.S. 엘리엇: 서평 280-281p

 

 

 

예술은 일단 감각이 선행되고 이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철학도 현대에 들어서 실존주의적 성격을 띄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예술도 그와 비슷하다. 예술은 작품을 감상하며 느꼈던 나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당시 나의 감정상태, 분위기 등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것과 맞물리며 작품에 대한 나만의 감각이 생겨난다.

 

 

 

 

저자는 칸트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보았다. 비판을 비판하는 것. 그것을 모더니즘으로 보았다. 과거 미술은 은폐하기 위해 미술이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만 보더라도 사실주의가 만연했고,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추상표현주의에 그린버그는 관심을 가졌다. 이것을 향후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으로 받아들인 듯 보였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그리고 20세기 시작된 입체주의 등을 지나 앞으로의 모더니즘 표현기법으로 알아본 것이다.

피카소, 토마스 에이킨스 등 다양한 화가를 비평한 에세이 모음집과도 같다. 개인적으로 부록 파트가 눈에 많이 갔다. 초반파트와 후반의 부록을 읽는 편이 시대상을 이해할 필요 없이 읽기 좋다. 중간 부분은 예술사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데는 나에겐 어려웠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