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 이어령의 책 한 권에 담긴 뜻 : 서문 모음집, 이것으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시간

728x90
반응형

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어령의 책 한 권에 담긴 뜻

지은이 : 이어령

펴낸 곳 : 국학자료원

펴낸 날 : 2022년 03월 09일

지프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받이 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랐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 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집으려고 뒷걸음 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치일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 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의 표정, 마치 가축처럼 무단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가던 그 뒷모습, 그리고....그리고 그 위급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메마른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벗겨진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것은 여유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처럼 세련되어 있지 않다. 운전수가 뜻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떼들이 차가 달려 왔을 때 날개를 펴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익의 재난들이 소리없이 엄습해 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도 잠은 몸짓으로 쫓겨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1부 뿌리의 언어 풍경 뒤에 있는 것. 11-13p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1963, 현암사]

 

 

골목길에서 크랙션을 울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골목길”은 무엇인가.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모이며 생겨난 길이다. 집과 집의 사잇길이다. 당연히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자 도로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관념속에 자리잡혀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막대기를 들고다니거나 바람개비를 들고 뛰었다. 왜 그랬을까. 골목길이 아이들에겐 편안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안락한 공간이 지척에 있으며 언제고 돌아갈 수 있다. “철수야 밥먹어라~”라며 창문을 열고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곧 귀가해야 되는 때가 된다.

그런 골목길에 차가 다니는 건 굉장한 실례다. 서행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기다려야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이 먼저다. 차량에 타고 있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냐고? 아니다. 차에 타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동차가 된다. 거대한 무기를 갖게 되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 음주운전을 하면 왜 처벌하나. 자동차가 가진 위험성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역사 동안 골목길에 서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뒤에 따라오는 자동차는 중국이었고, 일본이었고, 러시아였고, 프랑스였으며, 미국이었고, 북한이었다. 운전자는 크랙션을 울리며 공포를 줄 수 있는 존재다. 언제고 들이받을 수 있는 공포를 말이다.

중국은 천 년이 넘도록 우리의 골목길을 들이받았다. 고려에서 공녀를 차출해갔고 그 여인은 몽골의 왕비가 된다. 기황후는 그렇게 탄생했다. 왕이 머리를 세 번 땅에 박게 만들기도 했다. 또 인해전술로 통일을 앞에 두고 있던 우리를 갈라놓았다.

일본에게는 오래 전부터 우리의 골목길을 소개해주었다. 이는 4세기 때부터 시작된다. 이후 르네상스라 불리던 조선시대, 통신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모두 정리하고 쾌속선을 만들어 부산에 상륙했다. 우리 골목길은 모두 황폐화되었다. 골목대장 출신이었던 자들이 한데 모여 의병이란 이름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과 맞섰다. 그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사야카 (沙也可)는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 골목길에서 함께 뛰어다니게 된 것이다.

미국은 강화도에서 수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평등이란 이념을 들고서 선교활동하겠다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동학이란 종교가 무너지고 신자들은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밀약으로 땅따먹기 놀이를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우리 골목길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싶었던 미국은 지금까지 우리 골목길에 서있다. 언제고 심심해지면 떠날 수 있는 이방인이다. 함께하는 편이 낫지만, 그렇지 못할 수 있다.

어머니 아버지, 우리는 동양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같은 피부의 빛깔을 주시고 이름을 지어 주듯이, 그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지요.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알고 있어요. 옛날옛적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병풍을 쳤지요.

아침을 보내고 대낮을 보내고 저녁이 지나기를 기다렸지요.

깜깜한 밤중에만 돌아가신 영혼은 사립문 안으로 들어오신다고 하셨지요. 제사날에만 쓰는 그 촛대를 잘 압니다. 그날 밤에만 피우는 향합과 향로도 잘 압니다. 베옷을 입으셔야지요. 첫 밥을 지으셔야죠. 떠나버린 선조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동양은 그렇게 망령처럼 오시는 집니까. 돌아가신 사람처럼 병풍을 쳐야 우리들 곁으로 다시 오는 것입니까.

제사를 지내듯이, 무당이 초은 곳을 하듯이 그렇게 해서 찾아 내는 동양은 싫습니다. 마고자 단추 같은, 그런 동양은 없이도 좋습니다. 옛날 할아버지의 얼굴로 돌아오는 동양의 망령이 아니라, 내 어린 것들처럼 새로운 생명으로, 내어나는 동양의 모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냉풍과 초를 밑으로 몰래 다가오는 환각이 아니라, 돌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면 아장아장 걸어오는 그 어린 생명의 모습으로 그것은 우리 곁으로 찾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동양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넓은 비행장의 활주로에 우뚝 서 있는 동양의 모습을 우리는 모릅니다. 공장 굴뚝 위에 앉아 있는 학처럼 매연 속에서 깃을 치는 그 동양을 모릅니다. 숱한 상품이 실려 나오는 부둣가의 하역장에서,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당당히 걸어 나오는 장자를 모릅니다. 네온사인을 압도하는 불상의 미소를, 강철의 무기 위에 군림하는 춘향의 십장가를 우리는 모릅니다. 제사를 지내는 동양밖에 아는 것이 없습니다.

1부 뿌리의 언어 동양을 찾는 초혼가 16-17p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 1984, 갑인출판사]

 

 

동양의 문화는 죽음을 터부시해왔다. 마치 선악과처럼 말이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제자의 물음에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은 뒤를 어떻게 알겠느냐”라는 말로 답을 회피했다. 공자와 같이 오묘한 말로 설득하는 이들에겐 사후세계와 같은 깊은 것에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럴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유교사상은 사후세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아이고.. 사람 죽네 사람 죽어”라며 꾀를 부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하던 나이 든 노인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무의식 중에 죽음이 부정적인 것으로 자리잡았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죽은 자를 가까이 대하려 했다. 향을 피워 죽은 자를 부르고 음식을 대접한다. 모순이지 않은가. 동양 사상은 양면성이 강하다. 우리말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닫이, 미닫이 등 반대되는 표현을 서로 합쳤다.

제사 만으로 동양 문화는 설명할 수 없다. 지난 날 제사를 강조해왔던 터라, 제를 지내는 풍습은 점차 희석되어가고 있다. 불교가 꽃을 피웠던 천 년이 넘는 역사, 500년이 넘는 시간 우리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조선, 그 아래 문제가 되었던 유교와 성리학, 이것들을 우리는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다.

일본인 손에 들어간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 어떻게 다시 우리 품에 돌아왔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매일 밤 잠에 들면 불상이 말을 걸며 자신이 머물던 조선의 아랫 지방 고창의 한 사찰로 돌아가게 하라는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 이를 다른 장물아비에게 넘겼고, 그 장물아비 마저 악몽에 시달리며 몸이 아팠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동양 사상의 이야기를 모른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느샌가 밤을 뜬눈으로 보낼 수 있게 되며 도시는 네온사인 숲이 되었다. 자신이 살던 고향에는 광케이블이 심어지게 되었다.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남은 건 제사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동양 사상이라고 한다면, 나도 싫다.

부름으로 죽은 자와 마주하려는 것은 그다지 썩 좋지 않다.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말해오면서 정작 죽은 이를 찾아오게 하려는 것을 문화라고 쉬이 포장하면 안 된다.

경주를 보라. 죽은 자에게 묶여 산 자가 힘들다. 5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한다. 2층 이상으로는 땅을 더 깊게 파야하기에 2층까지만 올린다. 자칫하면 유물이 발견되어서 재산권 행사도 못하고 국가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웃픈 현실이다.

지금도 월성지구와 쪽샘지구 등 발굴 진행이 한참이다. 언제 마무리가 될 지 모른다. 다른 곳에서 유물이 대거 출토된다면 그곳도 무기한 보존상태로 바뀌게 된다.

죽은 자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동양 문화라면 싫다. 이어령 선생이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일 거다. 새로움에도 우리는 눈을 두어야 한다. 꽃이 피고 어린 생명이 태어나는 것, 탄생에는 사랑이 있다. 인간이 생겨난 건 하느님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겨난 건 사랑했기 때문이다. 멋진 예술 작품이 만들어진 건 그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일을 기리는 크리스마스. 물론 그가 실제 태어난 날이 아니라고는 하나, 어찌됐건 새 생명이 자라는 것을 축복한다. 그리스도교 뿐만이 아니다. 부처님 오신 날로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을 기린다. 각자의 생일도 축하한다. 심지어 좋아하는 연예인의 생일을 맞아 팬들은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 광고판에 축하 포스터를 개시한다.

새 생명이 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태껏 그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 우리는 어리고 작은 것이 태어나는 것에 눈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호적으로부터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의 오륙 년 동안이다. 몇 살이니?라고 어른들이 물을 때 아이들은 그냥 재롱을 떨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국민학교에만 들어가도 나이를 물을 때에는 호적을 떼다 받쳐야만 된다. 나이는 재롱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가 된다. 더구나 호적의 나이와 실제의 나이가 다른 나의 경우에는, 그리고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학교에 들어갔던 나의 경우에는 국민학교 이후와 국민학교 이전의 세상은 기원 전과 기원 후의 두 세기만큼이나 다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분명 여덟 살이었는데 책가방을 들고 교문을 들어서면 일곱 살이 되는 것이다.

나이만이 아니었다. 이름도 달라진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어머니가 부르시던 그 이름이 아니라 창씨개명을 한 일본 이름으로 호명되었다. 출석부는 호적부와 마찬가지로 나를 다른 이름으로 등록하였고 나는 그 등록된 이름으로 다시 학적부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태어나게 한 태줄의 언어는 자꾸 말라 비틀어지고 나의 탄생을 등록시킨 호적의 언어는 자꾸 확산되어 집채처럼 커져간다. 말도 세 살 때 배운 조선말이 아니라 일본말로 바뀐다. 내 진짜 생년월일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어머니에게서 배운 조선말은 위조지폐나 다름없는 무허가 언어가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외가가 있는 마 을 이름도 학교에서는 다르게 불리어진다. '새말'은 '좌부리'로 ‘쇠일’은 ’신흥리‘라고 해야 한다. 아니다. 호적이 지배하는 그 학교에 가면 피까지 달라진다.

제4부 바람의 언어 나의 문학적 자서전

1. 두 개의 생일 72-73p

[지성체집, 1986, 나남]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이름표를 바꿔야 하던 삶. 연예인도 아니고, 웨이터도 아닌데, 그 어린 아이는 아침에 책가방을 매고 교문 앞에만 들어서면 이름은 다르게 불려야만 했다.

귀빠진 날은 호적이란 종이에 등록된 날로 바뀌었다. 그것이 사회가 인정한 날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만과 나, 가족만이 아는 비밀스런 날로 바뀐 것이다. 사실이 가짜가 되는 삶. 서류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이 나의 진짜가 된다.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한국인의 역사, 위인 만의 역사가 아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지난 날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돌지 않는 바람개비는 이미 바람개비가 아닙니다. 정지는 바람개비의 죽음입니다. 항상 돌아가고 움직이고 꿈틀대야 합니다. 풍차가 물을 퍼 올리고 방아를 찧는 것은 그것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동력은 돌아가는 바퀴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바람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바람개비가 돌아갈 때 사람들은 비로소 바람의 속도와 방향과 그 색채를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바람개비의 이 가역성과 가동성 그리고 가시성의 세 가지 특성이 바로 창조적인 삶과 문화를 만들어 내는 세 가지 상징적 요소라고 할 것입니다.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환경이 그렇지 않다고, 시운이 없다고 스스로 한탄하고 주지않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바람개비 하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경쟁의 시련 속에서 살아가는 이 땅의 기업인에게, 가난한 문화인에게, 그리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바람이 없어도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던 나의 동기입니다. 지금 그 거친 강연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면서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 까닭은 어쩌면 여러분들이 이 책갈피 속에서 바람개비를 들고 언덕길로 뛰던 내 어린 시절의 그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제4부 바람의 언어 바람개비의 원리 93-94p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 1992, 동화서적]

 

 

심장은 계속해서 뛰어야만 한다. 그게 심장이다. 두 곳에서 전기 신호를 일정하게 만들어 피와 산소를 공급하고 더러운 피와 활성산소는 다시 회수해야 한다. 그 어떤 것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 사령탑이라 말하는 두뇌도 심장은 어찌할 수 없다. 제 알아서 움직이기에 뭐라 꾸짖거나 다그칠 수가 없다. 두뇌도 심장이 공급하는 피와 산소를 소비하기 때문에 책잡힐 일을 만들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바람개비를 들고 뛰면 바람개비는 열심히 돌아간다. 내가 뛰는 방향으로 바람은 맞이해서 다가온다. 그렇게 바람개비의 날개는 힘차게 돌아가고 나의 심장도 바람개비의 날개처럼 빠르게 뛴다.

어린아이들이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다녔던 건, 바람개비의 회전이 자신을 설레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열심히 뛰어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인지 모르고 바람개비 날개에 자신을 투영한 것이죠. 바람개비 덕분에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즐거움과 설렘은 바람개비에서 얻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동네를 뛰어다녔던 자신의 발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죠. 창조적 행위에는 역동성이 요구됩니다. 글쓰기는 생각의 역동성, 손의 동력이 필요하죠. 그림도 마찬가지 입니다.

글은 혼자 쓴다. 하지만 대화는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글이 말이 되고 혼자 있는 밀실 대화의 살롱이 되면, 생각도 달라진다.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듣는 기술도 있어야 대화가 성립되고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지적 초원으로 갈 수 있다.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둘이다. 그래서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는 가끔 혼자 말을 잘한다. 인형이나 강아지나 아이들은 상대편에서 말을 들어주고 대꾸를 하지 않아도 침묵하는 것들을 향해서 말을 건다. 독백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은 세계의 모든 것과 대화를 한다. 그렇게 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키가 성장을 멈추면 사람들은 혼잣말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독백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독백을 하면서 대화를 하는 데 어른들은 대화를 하면서 독백을 한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이다.

제5부 바다의 언어 대화로 새로운 지적 초원에 이르는 길 122-123p

[세계지성과의 대화, 2004, 문학사상사]

 

 

이 단락에서는 “성장을 멈춘 어른은 대화가 아니라 실은 독백한다”고 말한 부분이 심히 공감했다. 듣지 않는다. 각자 자기 할 말을 한다. 그래서 합의점을 찾기가 힘들다. 어린 아이들은 말다툼을 하다가도 다시 사이를 회복한다. 물론 어른들의 일부 개입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반면, 어른들은 아니다. 누군가 개입해서 관계를 회복시키려 하면 ”너 지금 걔 편드는 거야?” 라는 말이 돌아온다거나 오지랖으로 치부된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 할 말을 독백형태로 내뱉고 살아서 그렇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개선하는 것이 어렵다.

보컬레슨을 배우러 가면 발성에 방해되는 것들은 하지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 된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마찬가지다. 어느정도 익숙해질 때까지는 바뀌기 힘들다.

글과 대화. 이는 지성의 낙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글을 써보기 전, 여러 글을 읽어봐야 한다. 읽지 않고 쓰기만 하는 건 자기 할 말만 하는 것과 같다. 읽기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 의견 없이 남의 말만 듣는 꼴이다.

나는 많은 책을 써왔다. 글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쓰는 것이니 평생 독백을 해온 셈이다. 그리고 말이라고 해도 강연이나 강의 역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것 역시 독백에 가깝다. 논쟁을 많이 하고 희곡을 썼던 이유도 독백 형식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논쟁과 희곡이라고 해도 혼자 머릿속에서 말하고 답 하는 것이니 대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동안 대담이나 대화집을 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것은 대담이 아니라 왜곡된 독백이요, 메아리 없는 대화일 경우가 많았다.

제6부 생명의 언어 장고처럼 울리는 책 135p

[유쾌한 창조, 2010, 알마]

 

 

할 말이 많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쓰는 사람들은 하고자 하는 말이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다. 글쓰기라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갈증을 해소한다. 책은 불특정 다수가 보기 때문에 출간을 위해 집필하는 것도 독백이다.

크리에이티브하게 산다는 건 궁시렁 거려야 한다는 뜻이 된다. 중얼거리는 일,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들을 잠깐이나마 잡아두려 펜을 드는 것이다. 고독함이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혼자 줄곧 독백을 해온다는 건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요즈음 나는 70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과 시집을 낸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망령이 났다고들 합니다. 요즘엔 그것을 점잖게 알츠하이머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꼭 그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라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오랜 세월 글을 써 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새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요.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레를 받자마자 갑자기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에 이미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니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슴 속에도 거북한 무엇이 암종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가 봅니다. 겉으로는 강한 싸움꾼인척 하지만, 옆에서 누군가 한마디 훈수를 하고 조금만 역성을 들어주면 금세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약한 무신론자들인 겁니다.

제7부 영혼의 언어 151-153p

[지성에서 영성으로, 2010, 열림원]

 

 

불안한 존재인 것이 인간입니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죠. 사자는 사냥한 뒤에 쉬면 됩니다. 처자식이 있다면 말이죠. 잠깐 사냥감 잡는 데 도움만 보태면 삶이 편안해집니다.

반면에 인간은 어떻습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합니다. 또 과거를 종종 돌아봅니다. 언제 죽을 지는 몰라도 죽음이란 것을 압니다. 한 때 “죽기 전에 해야할 일”이란 비슷한 제목의 책들이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죽음을 알기에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신의 개념도 인간만이 알죠. 어떠한 동물도 자신의 죽음을 모르며 신의 존재를 모릅니다. 오로지 인간 만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심리학이 생겨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죠.

무신론자가 종교를 갖게 되는 일도 맥락이 비슷합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행동이라고 보이죠. 특히나 타인의 시선에는 더 그렇습니다. 당사자는 여러 가지 상황에 부딪히면서 단순히 심적 변화가 일어났던 것인데 말입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집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내 가슴과 머릿속에 있었던 것인데 몸 밖으로 일단 빠져나오면 네 발 달린 말보다 더 빠르게 도망칩니다. 어느새 벌판과 냇물을 지나 산등성이의 구름이 되어 흩어집니다. 때로는 뒤쫓아보지만 그것들은 벌써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다가 사막의 낙타, 바다의 돌고래처럼 나와는 아예 무관한 딴 짐승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글을 씁니다. 말들이 멋대로 새어 나갈까 봐 덫을 놓습니다. 그런데 문자의 덫에 걸린 그 순간, 말들은 생기를 잃고 까무러쳐버립니다. 맞아요. 말이 기절한 게 바로 글이지요. 그것들을 깨어나게 하려면 문자의 올가미를 풀어 다시 소리치게 하고 그 갈기가 바람에 날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하기와 글쓰기. 이렇게 50년 넘게 말과 글의 사이를 오가며 기대와 절망을 되풀이해왔습니다. 말하고 나면 허망하여 글을 썼고, 쓰고 나면 답답해서 말을 했습니다. 대학 강단에서,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혹은 광장의 청중들 앞에서 줄곧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내 몸에서 떠난 말들을 더 이상 뒤쫓거나 덫으로 구속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강의를 책으로 엮거나 흑백 시절부터 해온 tv 강연을 글로 정리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제7부 영혼의 언어 떡이냐 빵이냐 156-157p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2011, 열림원]

 

말은 주워담을 수 없어요. 뱉는 순간 곧 나의 생각으로 환원됩니다. 그러고선 휙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글쓰기를 합니다. 내 생각도 내 것인데, 휘발된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내 것 하나 없는 삶이 인생이라지만, 너무 빨리 사라지는 건 섭섭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말을 만든 뒤 조금 지나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시작은 상형문자같이 그림의 성격을 띄었지만 말이죠. 점차 변화하여 글자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 나의 말이 정확하게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보내줬던 생각들이 감사하게도 다시 나를 찾아와줍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다시 말을 하죠. 10여 년 전 초등학교 국어책은 말하기 • 듣기 • 쓰기였습니다. 말하고 듣다보니 써야 한다는 걸 느낀 것이겠죠.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의 저작들의 서문을 한데 모아두었다. 대개 서문은 책의 서두를 밝히는 정도의 내용으로 쓰인다. 그의 책은 아니었다. 서문을 따로 떼놓고 보아도 그의 생각이 온전히 남아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서문으로도 얼추 이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