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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자아의 초월성 / 책을 읽을 때 ‘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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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자아의 초월성

지은이 : 장 폴 사르트르

옮긴이 :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출판사 : 민음사

출판일 : 2017-01-13

내가 전차를 뒤쫓을 때, 내가 시계를 볼 때, 내가 초상화 감상에 몰입할 때, 나는 없다. 단지 ‘따라잡아야-하는-전차’에 대한 의식과 같은, 의식에 대한 비정립적 의식이 있을 뿐이다. 사실 나는 대상들의 세계 안으로 빠져든다. 그 대상들은 내 의식들의 통일성을 구성하며, 매력적이고 혐오스러운 성질들, 가치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 즉 나는 사라졌다. 나는 무화되었다. 그 수준에는 ‘자기’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리고 이는 어떤 우연 내지 순간적인 주의의 결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식의 구조 자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1부 나와 자기, 48p

어떠한 행위 앞에 존재란 무와 같다. 몰입하는 순간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노래에 빠지면 멜로디에 사로잡혀 있을 뿐, “음악적 감상이 어떠하다” 라며 판단할 수 없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난 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악론, 행위론, 이를 생각하고 결론을 내는건 대상에 빠지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아의 상태가 되고 그 사이에 반영된 대상에 대한 느낌이 내 생각과 적절한 조합을 이뤄 판단결정을 내린다.

“여기, 지금, 나” 만이 남는다. 사르트르가 하고자 했던 말이다. 나를 규정짓는 모든 것을 제외할 때 남는건 이 셋이다. 어떠한 감상이 시작될 때는 여기서 ‘나’까지 사라진다.

 

 

 

 

 

 

 

 

 

자기는 오직 반성적 지향의 노에마적 상관물로, 반성 행위와 함께 나타날 뿐이다. 우리는 나와 자기가 오직 하나가 될 뿐임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나와 자기는 자아의 두 측면일 뿐이다.
[•••]

나, 그것은 행위들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이다. 자기, 그것은 상태들의 그리고 성질들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이다. 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들 사이에 사람들이 설정하는 구분은 문법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단지 기능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1부 나와 자기, 3 자기의 ‘질료적 현존’에 관한 이론 67p -68p

나는 존재자이다. 비반성 행위에서 반성 행위로 전환될 때 ‘나’ 가 드러난다고 말했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바뀔 때 그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글자를 읽을 때는 ‘나’는 없다. 읽고 난 뒤에 활자를 생각하고 난 뒤 의미를 이해하려고 할 때(반성행위) 부터 ‘나’는 존재한다.

몰입의 순간에는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성행위들이 합쳐져 자아를 만든다. 경험의 순간 이후에 겪는 반성행위들이 곧 ‘나’가 되는 것이다.

 

 

 

 

 

 

 

 

 

 

 

 

 

심리적인 것은 반성적 의식의 초월적 대상이며 또한 심리학이라 불리는 학문의 대상이다. 자아는 심리적인 것의 지속적인 종합을 실현하는 하나의 초월적 대상으로 반성에 나타난다. 자아는 ‘심리적인 것’쪽에 있다.

2부 자아의 구성
4 행위들, 상태들, 그리고 성질들의 극으로서 자아의 구성 85p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는 반성행위는 심리학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단순히 두뇌의 반응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걸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놓는 심리학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종합학문으로 볼 수 있다.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 것을 먹는 이유라던가 아이의 사춘기 반응은 왜 제각기 다른 것일까 라던지 말이다. 모두 두뇌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고만 설명하기에는 인간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질과 성향 그리고 성격을 서술할 때 비로소 납득할 수 있다. 심리학자의 연구는 보통인들의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성질들에 관해 말하자면, 성질들은 자기를 '규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어떤 것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집합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령 각각의 돌, 각각의 벽돌은 그것들 자체에 의해 존재하며, 그것들의 집합체는 그것들 각각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로 자아는 지속적인 진정한 창조를 통해 자신의 성질들을 유지한다.

95p

진정한 창조란 앞서 표현된 반성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삶을 사는 동안 우린 끊임없이 비반성행위와 반성행위를 오간다. 이 과정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에 무언가 깊게 자리잡는다. 그것이 우리의 자아가 되며 ‘나’가 되는 것이다. 나의 존재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들어놓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자아는 자신의 상태들의 창조자이며, 일종의 보존하는 자발성을 통해 자신의 성질들이 존재하도록 지탱한다.
96p

무언가에 몰입하게 되는 비반성행위와 이 뒤에 따라오는 반성행위를 통해 자아, ‘나’가 탄생한다. 여기서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위해 다시 몰입의 과정에 투입된다. 업무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이것들이 다시 나를 존재자로 있을 수 있게 만든다.

 

 

 

자아는 반성적인 의식을 통해 파악된 대상일 뿐만 아니라 ‘구성된’ 대상이다. 자아는 통일의 잠재적인 중심이며, 의식은 실재적인 생산과는 ‘반대 방향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실재적으로’ 첫 번째로 오는 것은 의식들이다. 그것들을 통해 상태들이 구성되며, 상태들을 통해 자아가 구성된다. ••• 의식은 대상으로서의 자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창조하는 힘을 부여하기 위해 의식의 고유한 자발성을 대상으로서의 자아에게 투사한다.

100p

앞서 말했듯, 반성행위들이 모여 ‘나’가 된다. 이말인즉슨 반성적인 의식은 나를 존재자로서 만들어준 하나의 요소다. 이 의식은 자발성을 띄고 자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자발성은 아마 반성행위 이전에 나타나는 무의식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몰입의 상태에서는 내가 없고 이때의 행동과 의식이 더해져 나를 만든다’고 이해하면 사르트르의 말이 얼추 이해가 된다.

 

 

 

 

 

 

 

우리는 다음처럼 우리의 명제를 정식화할 수 있다.초월론적 의식은 비인격적 자발성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결정하며 우리는 '의식에 앞서는' 무엇도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 의식의 삶의 매순간은 우리에게 무로부터의 창조로 드러난다. 이것은 새로운 '배치'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에게 골칫거리인 것은 존재의 끊임없는 창조, '우리가' 창조주가 아닌 이 창조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러한 층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넘처흐르며 항상 (자신의) 예기치 못한 풍요로움을 깨닫게 된다.
(•••)

실제로 자기는 이러한 자발성 위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이러한 자발성에 의하여 구성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스스로 상태들, 감정들 혹은 사물들을 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에게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의 의식을 ‘원할’때 그것을 쉽게 이해한다. (나는 잠자기를 ‘원한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생각하기를 ‘원하지’않는다와 같은 경우에서 말이다.)
123p-124p

의식 앞에 우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의식 뒤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행위에 빠져있는 ‘나’만 존재할 뿐이다. 이때의 ‘나’는 ‘나’가 아니다. 반성행위 이전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글자를 읽을 때 나는 없다. 활자와 나를 스스로 구분할 수 없다. 몰입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총평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을 펼쳤다. 실존이 인간의 존재를 선행한다. 지금 놓여진 현실이 중요한 것이다. 극단적 현실주의, 개인주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지금, 여기, 나. 이 세 가지로 단순화시켜 현실을 바라보고 철학을 풀어나갔다.

고통이고 뭐고 먼 미래의 이야기는 중요치 않다.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고통을 벗어나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우선된다. 현실적인 고통에서 멀어질 때 비로소 철학이란 배부르고 등따뜻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사랑받았던 건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 먼저라는 의미를 서민들에게도 적절히 제시되었다. 철학이 단순히 고고하고 부유한 이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소비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려주었다.

또, 철학이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는 기존의 내용들을 무시했다. 그는 철학을 내가 지금 당장 사유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을 때 내 것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춥고 배고프다면 철학 따위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몰입의 순간에 접어들 때 나는 없다. 텅 비어있는 나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려하는 건 사르트르에겐 무의미한 것이었다. 반성행위를 거쳐 자신에 대해 사유할 때 존재자로서의 의미를 되새기고 철학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실존주의 철학은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현실화라고 단순화시킨 뒤 그의 말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나마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다.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 그 언젠가 그가 얘기해줄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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