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팡세
지은이 : 블레즈 파스칼
옮긴이 : 이환
펴낸 곳 : 민음사
펴낸 날 : 2003-08-25
2-(274) 우리의 모든 이성적 사고는 결국 감정에 굴복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환상은 감정과 유사하면서도 반대되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상반되는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을 환상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자기의 환상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이성이 기준으로 자처하지만 이성은 어느 방향으로나 휘어진다. 그래서 기준이 없다.
3-(29) 문체. 자연스러운 문체를 대할 때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기뻐한다. 한 작가를 만나리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한 인간을 만나는 것이다. 반대로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보면서 인간을 만나리라 기대했는데 한 작가를 만나게 되면 크게 놀란다. Plus poetice quam humane locutus es." 자연은 모든 것, 심지어 신학까지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참으로 자연을 영화롭게 한다.
A.머리말 14p
감정은 정해져 있다. 직관적이다. 분노, 슬픔, 기쁨. 반면에 이성은 복잡하다. 논리와 구조를 갖춰야 한다. 때문에 직선적인 감정을 이성이 감싸려고 한다. 이는 다른 말로 사회화라고 한다. 감정에 충실하면 혼잡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에 기대야 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 거기서 우리는 글쓴이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정제된 글에서는 그 느낌을 쉬이 받을 수가 없다. 글의 힘이 약하다. 자연의 힘은 강하다. 그래서 자연스러움을 따라야 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에 맞춰 편안함을 따라야 된다. 글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면 안 된다. 그대로 둬야 한다. 나 역시도, 이곳에 글을 쓸 때 탈고하지 않는다. 그냥 생각대로 쓰고 발행한다. 굳이 수정한다면 맞춤법 정도.
신을 알지 않고는 행복이 없고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행복해지며 따라서 궁극의 행복은 신을 확실히 아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불행해지고 따라서 궁극의 불행은 반대의 것을 확신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B.서론 31p
파스칼은 신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보았다.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만. 그는 이어 신의 존재, 신의 부재에 대한 나의 효용가치를 따져보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결론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대답이다. 때문에 팡세에서 신이 있다라는 기준 하에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556)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모독한다. 기독교는 두 가지 점으로 성립되어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중요하고 이것을 모르는 것은 똑같이 위험하다. 그리고 이들의 표시를 주신 것은 다 같이 신의 자비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둘 중 하나를 결론지어야 한다는 이유로 또 하나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신이 한 분뿐이라고 말한 지혜로운 사람들은 박해받았고 유대인들은 증오를 샀으며 기독교인들은 더 심하게 당하였다. 이들은 자연의 지혜에 따라, 만약 땅위에 참된 종교가 있다면 모든 것의 움직임은 마땅히 그 중심을 향하고 이 종교로 향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물들의 모든 움직임은 종교의 확립과 위대함을 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람들은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일치된 감정을 마음속에 가져야 한다. 끝으로 이 종교는 만물이 향하는 중심과 목적이 됨으로써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은 특수하게는 인간의 모든 본성을, 일반적으로는 온 세계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반 위에서 그들은 기독교를 모독할 구실을 찾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위대하고 전능하고 영원한 유일신을 공경하는 것으로 성립되었다고 상상한다.
B.서론 35p
신은 있다, 라고 입장을 취했을 때 신은 유일한 존재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래서일까. 기독교는 유일신 하느님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공경한다. 그래선 안 되지만 신자라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사찰은 들어가지 않으려 하며 타종교를 배척하는 발언을 일삼는다. 유일신이 존재했기에 그리스도라는 대리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려 왔다고 말한다. 예수 불신은 지옥을 향할 것이라는 극단적 종교주의자들이 1호선 또는 영등포역 앞을 거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원리도 모른 체 그냥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39-(421) 나는 인간을 찬양하기로 결정한 사람들과 인간을 비난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그리고 위락을 즐기기로 한 사람들을 다 같이 비난한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음하면서 추구하는 사람들뿐이다.
제1편 순서 44p
이 대목에서 니체가 영감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그저 다리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한 니체. 이것이 초인주의다.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평가 대상이 될 수 없는 걸까. 찬동도 비판도 비난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과정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넘어가야 할 대상이고 그저 과정일 뿐이라면서 찬양 혹은 비난 그 무엇도 해서는 안 되는 건가. 더 나아질 수 있다면 과정도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위장이고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그는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피한다. 정의와 이치에서 이토록 동떨어진 이 모든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성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제2편 헛됨 71p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면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면을 쓰고 광대가 되거나 양반이 된다. 자신을 감추기 바쁘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위선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은폐는 무엇일까. 가린다는 것이고 볕이 들지 않는다는 거고, 쉽게 부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감추려고 하니 부패가 생겨나는 거다. 가면을 벗고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이다. 때문에, 신이 있다는 것을 택하는 편이 수지타산에 맞다고 말한 파스칼의 주장이 얼추 이해가 되려 한다.
104-(181) 우리는 너무나도 불행하기에 어떤 일을 즐길 때에도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조건하에서만 즐긴다. 실제로 숱한 일들이 그렇게 될 수 있고 또 수시로 그렇게 된다. 그 반대의 불행을 걱정하지 않고 행복을 즐기는 비결을 발견한 [사람]은 요점을 찾은 셈이다. 그것은 계속적인 움직임이다.
제3편 비참 73p
한국인, 우리는 더 그렇다. 지금의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걱정하기 바쁘다. 자신이 누려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혹여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우리는 공동체 주의로 살아왔다. 때문에 누구 하나 잘 나는 것에 반감이 컸다. 이질스럽기 때문이다. 사촌이 땅사면 배가 아팠던 것은, 잘 산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이질적인 느낌에 배척하게 되는 인간의 태도가 결합된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어도 숨기기 급급하거나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127-(414)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쳐 있다. 그래서 미치지 않은 것도 다른 형태의 광기라는 점에서 미친 것과 같다.
제3편 비참 83p
인간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미쳐있다라는 증거다. 부동자세를 시키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으려 하면 몸은 무엇을 느끼는가. 어디 한 쪽이 괜히 가렵다고 느낀다.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295-(432) 회의주의는 진실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자기가 위대한지 비속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위대하다고 말한 사람이나 비속하다고 말한 사람은 실은 아무것도 몰랐으며 이유 없이 우연히 추측했을 뿐이다. 나아가서는 어느 한쪽을 배제함으로써 그들은 항상 오류를 범하였다.
Quod ergo ignorantes quaeritis, religio anuniar vobis."
<너희가 알지 못하고 찾는 것을 종교가 너희에게 알려준다.〉 '사도행전 17:2의 바율의 말을 상기하라.
제9편 철학자들 155p
인간은 늘 불안했다. 다른 동물처럼 먹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두뇌도 커지게 되었다.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비는 왜 오는 것이며, 태풍이 왜 와서 사람 살기 힘들게 만드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깊어지는 생각에 자신의 존재까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답은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 속시원히 해결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대리자로 내려보낸 예수는 결국 우리의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많은 이들은 그의 말에 설득당했고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는가. 도마는 왜 예수를 믿지 않았는가. 아무 것도 몰랐기에 그런 것이다.
336-(257)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있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첫째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행복하고, 마지막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불행하다.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합리적이다.
제12편 서두 178p
신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파스칼은 그 편이 낫다고 말했다. 신을 발견하고 섬기는 것을 제일이며,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까지도. 이 말이 맞을까?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 인류의 숙제다. 신인론이 제일 그럴듯해보이나, 아직은 종교가 우세하다. 먼 미래의 인류가 우리에겐 신과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과거 인류가 스마트폰을 쓰는 우리를 보며 무엇이라 생각하겠는가.
355-(268) 복종. 복종해야 할 때 복종하고 회의해야 할 때 회의하고 확신해야 할 때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의 힘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이 세 원리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복종할 경우를 모르기에 모든 것을 회의하거나, 판단해야 할 경우를 모르기에 모든 것에 복종하거나 한다.
회의주의자, 기하학자, 기독교도, 회의, 확신, 복종.
제13편 이성과 복종과 이용 190-191p
판단력이 떨어지니 그 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신을 모르기에 무신론 카드를 꺼내며 신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갖는다. 신이 있다면, 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살고 있으며 오병이어로 일부의 사람들만 구제한 것이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며 몇몇 이들은 신에 대한 불신과 부재로 회의론자가 되기도 한다.
복종은, 내가 무력할 때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서 말이다. 그런 분위기는 판단할 수 있지 않은가. 증명은 보여주는 것이다. 증명이란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성립된다. 때문에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고통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쾌락에 굴하는 것이 수치다. 이것은 고통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가해지기 때문도 아니고 또 우리 자신이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의로 고통을 추구하고 또 고통에 굴복하고도 이런 비굴함을 갖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고통의 압력에 굴하는 것은 영광이 되고, 쾌락의 굴레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러하다 - 고통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그것을 택하고 그것에 지배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에 있어 주인이고, 바로 그렇기에 인간은 고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에 있어서는 인간이 그것에 굴복한다. 지배와 통제력만이 명예를 가져오고 굴종만이 수치를 가져온다.
제2부 제8편 잡록 510-511p
고통을 택하는 건 전적으로 나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다. 쾌락을 택하는 것과 다르게. 그래서 쾌락에 쉽게 굴복한다. 고통은 그것을 견뎌내려 한다.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고통에 반발하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갖는 다는 점에서 고통과 쾌락을 택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때문에, 노력한 자를 향해 손가락질이 아닌 박수를 치는 것이다. 결과가 좋건 나쁘건, 주체성을 갖고 고통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도 니체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고통은 나를 죽게 하지 않는 한,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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