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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디지로그: 선언편 - 한국인이 이끄는 첨단정보사회 그 인간적인 미래를 읽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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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디지로그: 선언편

- 한국인이 이끄는 첨단정보사회 그 인간적인 미래를 읽는 키워드

지은이 : 이어령

펴낸 곳 : 생각의나무

펴낸 날 : 2006년 04월 06일

한국인의 생활은 한복에서 양복으로, 한옥에서 양옥으로 변했다. 그러나 먹는 것만은 여전히 한식이다. 부분적으로는 양식이 파고들고 젊은 세대일수록 패스트푸드에 빠져들고 있지만, 밥상 이 식탁으로 변한 아파트 생활에서도 여전히 숟가락과 젓가락은 포크와 나이프에 밀려나지 않았다. ‘식(食)’의 입맛만은 디지털 혁명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그 어금니 문화가 지금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왔던 디지털의 사이버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먹는다는 한국말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다는 물질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멋’이라는 말이 바로 '맛’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먹는 것’을 보릿고개를 넘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만 생각해왔다.

그것이 사물을 인식하고 느끼는 힘, 그리고 마음과 생각을 전하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왔다.

봄놀이를 나온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꽃이나 경치를 눈으로 감상하는 사람보다는 싸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입으로 감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한국인은 볼 ‘관(観)’자의 관광이 아니라 먹은 '식(食)' 자의 식광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강촌 온갖 꽃이 먼빛에 더욱 좋다" 라고 노래한 윤선도 시인의 관광은 역시 머리에 먹물이 많이 든 식자들의 꽃 경치 감상법이다. 토박이 한국인은 멀리서가 아니라 한 치라도 가까이 가서 온몸으로 느끼려고 한다. 눈으로는 안 된다. 역시 극한까지 꽃으로 다가가는 방법은 먹는 미각 밖에는 없다. 봄의 풍광을 쌈처럼 싸서 한입에 넣어 어금니로 씹고 목구멍으로 넘겨야 비로소 직성이 풀리는 것이 오랫동안 내려온 한국인의 자연 감상법이다.

그것을 좀더 심화시키고 세련된 양식으로 변한 것이 술 문화요. 차(茶)문화다.

1.정보를 먹어라 미디어로서의 음식과 몸

33-35p

 

나들이를 나갈 때 우리는 도시락을 싸가곤 한다. 돗자리를 펴 도시락을 꺼내 먹는다. 꽃구경을 하는 것인지 밥을 먹으러 온 건지 외국인의 시선에서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센트럴파크나 다른 외국 공원을 보면 사람들은 누워 일광욕을 쬐는 모습이 많다. 먹는 모습보다는 운동하거나 쾌창한 날씨를 즐기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먹는 것에 있어 오감을 사용한다. 보고, 맡고, 먹고. 풍경이 좋은 곳에서 먹는 건 다양한 감각을 자극한다. 한국인은 먹을 때만큼은 온 감각을 이용하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그때만큼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 찾아와서 그럴 지도.

 

"웬 떡이냐" 라는 말은 의문형 감탄사다. 그 다음에는 "누구네의 생일떡이다". "아무개 집 고사떡이다' 라는 대답과 설명이 뒤 따른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밤을 넣어 버무린 ‘밤 시루떡'이면 사내아이의 생일일 것이고 곶감을 넣고 빚은 ‘감 시루떡' 이면 여자아이의 생일일 것이다. 이미 떡 자체가 하나의 미디어로서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메시지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떡을 받는 수신자는 수동적인 정보의 소비자가 아닌 것이다. 감춰진 정보를 읽고 스스로 정보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정보 발신의 참여자가 된다. 그것은 꼭 정보시대의 특징인 소비자가 생산에 참여하는 프로슈머(Prosumer)와 같다.

"아니 그 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나! 세월 참 빠르네" 라고 아버지가 코멘트를 붙이면 어머니는 옆에서 "그애가 복동이지. 이젠 그 집도 살 만큼 됐어요" 라고 장단을 맞춘다. 그리고 고사떡일 경우에는 "그 어른 어제까지 정정하셨는데”라고 걱정하기도 하고 ”별 일 있을라구유" 라고 위문의 말도 나눈다.

[•••]

떡 돌림 정보는 또한 개인과 집단의 경계선까지 허문다. 대개 식사는 혼자 먹는 독식 형과 여럿이서 함께 먹는 공식형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떡 돌림의 양식은 잔칫집에 여러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는 공식형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을 닫아걸고 자기네들끼리만 먹는 독식형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떨어져 있어 따로따로이지만 한 집 한 집 떡을 돌려 함께 떡을 나눠 먹는 것은 '따로 그러나 함께'라는 특이한 제3의 원리를 만들어낸다. '함께’와 ‘따로' 라는 반대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룬 떡돌림 원리의 그레이존이 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호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2.“웬 떡이냐!”의 정보 모델

‘함께 그러나 따로’의 호저 공간

43-44p

 

이사오면 시루떡을 돌린다. 나를 알리는 수단이다. 원주민의 경계를 푸는 것이다. 이사왔다는 소식과 함께 기쁜 일을 나누고픈 마음과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을 도와달라는 뜻을 전달하는 거다.

이와 비슷한 것이 지붕에 새끼를 꼰 줄을 걸고 고추를 매다는 것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인데, 담장 너머 다른 이들도 볼 수 있다.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경사난 일을 입밖으로 내는 것은 부정을 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서양 사람들이 식탁 위에서 휘두르는 포크와 나이프 역시 전쟁무기와 무관하지 않다. 포크는 삼지창과 같은 창이고 나이프는 무력의 상징인 칼이다. 실제로 9 • 11 테러 이후 금속제 포크와 나이프는 항공 여객의 휴대 금지 물품 목록에 올라 있다. 그들의 식사도구가 곧바로 무기라는 것을 입증한 실례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가 사람을 죽이는 활에서 생겨 난 것처럼, 슈퍼마켓에 즐비한 통조림이 나폴레옹이 현상금을 내걸어 개발한 군용 식품이었듯이 서양에서 정보기술은 원천적으로 전쟁과 깊이 얽혀있다.

3.젓가락의 정보 마인드 -RT

정보는 정이다. 61p

 

서양의 식사도구와 달리 숟가락과 젓가락은 결이 다르다. 젓가락 끝은 뭉툭하고 숟가락은 오목하다.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유추할 만한 표식이 없다. 그의 다른 저서에서도 젓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하나만이라면 그냥 꼬챙이다. 꼬챙이는 찌르는 것이고,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는 것이다. 그리나 그것이 두 개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찌르고 꽂고 하던 것이 갑작스레 집고, 잡는 전혀 다른 용도가 된다.

같은 막대기인데 하나가 아닌 두 개를 사용하려는 그 마음이 젓가락질을 낳았고,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로 변하는 문화유전자를 태어나게 한 힘이다.

너 누구니 젓가락의 문화유전자 / 파람북 (2022) /

5.사이 고개

둘째 꼬부랑길

결합하고, 조화하고, 연결하는 동양의 문화

결합하라. 연결하라. 융합하라.

21 세기의 창조 코드를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다.

젓가락은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미래다.

126-127p

 

막대기 두 개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사용한다. 손가락을 사용해서 말이다.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인가. 그러나 젓가락질을 한다. 못하는 한국인은 없다. 젓가락 문화권의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다. 밥먹는 순간 만큼은 평화롭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말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주지 않았다. 한쪽으로는 거의 무방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만, 다 먹힌 것 같은 순간에도 자신의 일부를 다 내주지 않고 지킨다. 그래서 동해라고 하면 이미 바다란 말이 들어가 있는데도 동해 바다라고 하고, 초가에는 집 가(家)자 들어 있는데도 초가집이라고 하여 세 살 때 배운 순수한 자신의 토박이말을 갖다 붙인다.

6.청룡열차를 탄 한국인 왜 동해가 아니고 동해바다냐 126p

그런데 우리나라 말은 한자가 들어와도 황토흙이라고 하고, 동해바다라고 해요. 여러분에게 나눠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보면 내가 황토흙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런데 교정을 보는 편집자가 계속 흙 자를 빼는 거예요. ' 황토' 하면 리듬도 안 맞아요. 흙을 넣으면 또 교육부에서 겹침말 안 쓴다고 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책이 무수히 많은 판을 찍었는데 황토흙이라고 된 것도 있고, 황토라고 된 것도 있어요. 그건 내가 최종 교정을 못 본 책이에요. 송창식이 노래 부를 때 "동해바다로 고래 잡으러 가자"고 하지, "동해로 고래 잡으러 가자"고 해요? 처갓집도 마찬가지예요.

한자만 그러면 말을 안 해요. 일본 말도 마찬가지예요. 모찌가 떡인데 우리는 모찌떡이라고 해요. 빵이 서양 말인데, 빵떡이라고 해요. 깡이 'can', 즉 통인데 깡통이라고 말해요.

그러니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한자든 일본어든 영어든 외래어가 들어오면 반드시 우리말을 거기에 붙여서 흔적을 남긴다는 거예요. 무수한 한자, 교활한 일본어, 압도적인 서양말 중에 그래도 눈물의 흔적처럼 내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교육부에서 겹침말이라고 못 쓰게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어법이라는 이야기예요

거시기 머시기 / 김영사 (2022)/

220p 6 한국말의 힘 : 토씨 하나만 고쳐도 달라지는 세상, 푸른색과 초록색의 차이

*서울대학교 교수학습개발센터 글쓰기교실 초청 강연(2014년 5월)

 

 

그대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우리다. 수용과 거부 그 사이를 택했다. 변형. 받아들이되, 우리 것으로 바꿔 부르는 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가 할 수 있던 우리만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을 상대로 우리를 지켜낼 수 있었고 일본을 견제하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보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다. 같은 시대, 같은 정부기구의 명칭인데도 국가정보원의 정보와 정보통신부의 정보는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 개인이 사용하는 정보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정보가 샌다". "정보를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물과 같은 액체로 생각한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다 대던 농경시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정보를 캔다", "정보를 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무슨 석탄이나 노다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산업시대인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가 환하다". "정보에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빛이다.

"정보를 맡았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짐승이 지나간 체취를 통해 추적하던 원시적 감각의 산물이다.

정보기술을 새 패러다임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 라고 말할 수 있다.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속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 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8.정보사회의 거품이 걷힐 때

정보에 대한 오해와 편견

144-146p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태도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물이 반이나 차있네”와 “물이 반밖에 안남았네” 같은 것이다. 정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갈지를 알 수 있다. 이어령 선생은 마치 소중하지만 독점할 수 없는 자연에 빗대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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