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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인간이란 무엇인가 / 흄의 철학 기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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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오성 정념 도덕 本性論

지은이: 데이비드 흄

옮긴이 : 김성숙

펴낸 곳 : 동서문화사

펴낸 날 : 2016년 11월 30일

인간 정신에 나타나는 모든 지각은 결국 서로 다른 두 종류로 되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인상’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상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에 우리는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때 감각, 정념 그리고 정감 등이 우리의 영혼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선 이것들을 모두 인상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킨다. 또한 나는 '관념'이라는 말로, 사고 및 추리에 쓰이는 이들 감각•정념•정감의 흐릿한 반영을 나타내고자 한다. 예컨대 그것은 이 논고를 통해 불러 일으키는 지각 가운데 시각 및 촉각에서 비롯되는 약간의 것을 제외하고, 또 직접 야기되는 쾌감이니 불쾌감이니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각을 뜻한다. 나는 인상과 관념의 이런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든 저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즉시 파악할 테니까.

18p 제1편 오성

1부 관념과 그 기원, 구성•연관•추상

1 관념의 기원에 대하여

인상과 관념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데이비드 흄. 인상은 강렬한 지각을 말한다. 첫 눈에 반했다고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첫인상이 강렬했다”라고도 말하고. 인상은 그런 개념으로 파악하면 좋을 듯하다. 이에 반해 관념이란 것은 생각하기 위한 사고하기 위한 지각들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사람과 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볼 때 어떠한가. 그 기준이 무엇인가. 두 명의 사람을 볼 때 느끼는 건 바로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때의 모든 감각과 정념들이 관념에 해당한다. 내재되어 있는 사고를 건드리는 것.

 

우리의 감관이 인상을 구별하거나 독립적이고 외부적인 어떤 것의 심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관은 우리에게 단일 지각만 전달할 뿐이며, 지각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조차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지각은 이성이나 상상력의 어떤 추정에서 비롯되지 않고는 이중 존재의 관념이 결코 생겨날 수 없다. 정신이 자신에게 직접 나타난 것 이상을 보려고 할 때 품는 결단은 결코 감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정신이 단 하나의 지각에서 이중 존재를 추정하고 두 개의 존재 사이의 유사와 인과 등의 관계를 가정한다면, 정신은 확실히 감관에 나타난 것 이상을 본다.

따라서 감관들이 독립적인 존재의 관념을 암시한다면, 그 감관들은 하나의 오류와 환영을 통하여 인상을 정신과는 별개의 존재로서 전달해야 한다.

212p 제1편 오성

4부 회의적 철학 체계와 그밖의 철학 체계

2 감관들과 관련된 회의론에 대하여

“인상이 관념의 원인이다.” 를 주장하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단순 인상이 선행되어야 관념이 자리잡는 것인데, 흄은 어린 아이에게 오렌지색과 진홍색에 대해 그리고 단맛과 쓴맛에 대해 어른이 먼저 알려주는 것을 예로 들었다. 관념은 먼저 단순 인상을 준 뒤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각은 지각에서 끝나고 이후 나타나는 과정에서 단순 인상이 관념으로 자리잡는 것이고 이성과 상상력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면 되겠다.

[•••] 즉 아름다움은 부분의 질서 또는 구성이다. 우리 본성의 1차적 구조 때문이든 아니면 습관 또는 변덕 때문이든, 이 질서나 구성은 영혼에 쾌락과 만족을 주기에 적합하다.

이 점이 바로 아름다움의 뚜렷한 특성이며, 아름다움과 흉 사이의 완전한 차이점이다. 흉의 자연적 성향은 언짢음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쾌락과 고통은 아름다움과 흉의 필연적 동반자일 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흉의 본질 자체를 조성한다. 그리고 실제로 동물이나 다른 대상들에서 우리가 찬탄하는 아름다움은 대부분 편의성과 유용성 관념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런 견해에 망설임 없이 동의할 것이다. 어떤 동물은 강한 힘 을 만드는 모습이 아름답고, 또 다른 동물은 민첩성을 상징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왕궁의 정연함과 편의성은 그 형태나 외양과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움의 본질적 속성이다. 마찬가지로 기둥의 꼭대기는 그 밑부분보다 가늘어야 한다는 것은 건축술의 규칙이다. 그런 형태를 통해 안정성 관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유쾌하다. 반면 그와 반대의 형태를 통해 우리는 위 험을 느낀다. 그것은 언짢다. 이러한 실례는 얼마든지 있으며, 아름다움도 재치처럼 오직 취향이나 감각을 통하여 식별할 수 있을 뿐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을 엄두에 둘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릴 수 있다. 즉 아름다움은 쾌락을 낳는 형식일 뿐이며, 흉은 고통을 전하는 부분 구조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고통과 쾌락을 낳는 능력은 아름다움과 흉의 본질을 구성하므로, 이런 성질을 낳는 모든 결과는 감각에서 유래되어야 한다.

334-335p 제2편 정념

1부 긍지와 소심

8.아름다움과 흉에 대하여

관념 속의 질서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의 이후 저서인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에도 드러난다. 이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은 내재된 미의 관념이 작동하며 분류한다. 사람마다 미를 느끼는 감각이 다르다. 수학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비율의 작품에 아름다움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작품에서 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다비드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바스키아의 무제라는 작품에서 강렬한 스탕달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건 살아온 환경에서 쌓여진 관념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과 미움의 정념은 언제나 자비와 분노를 수반한다. 아니, 오히려 서로 결부된다. 바로 이런 결부야말로 사랑 또는 미움의 정서를 긍지나 소심 따위와 구별하는 주된 것이다. 긍지와 소심은 영혼의 순수 정서이며, 어떤 욕구도 수반하지 않고 우리의 행동을 직접 유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그 자체로서 완성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산출한 정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다른 어떤 것으로 보낸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수반하고 불행에 대한 혐오를 수반한다. 미움은 미워하는 사람의 행복에 대한 혐오와 불행에 대한 욕구 따위를 산출한다.

402p 제2편 정념

제2부 사랑과 미움

6. 자비와 분노에 대하여

사랑과 미움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다. 사랑 때문에 화가 나고, 사랑 때문에 기쁘기도 한다. 미움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미움 때문에 불행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포용할 수 있는 것이고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간디의 자서전 속의 말은 미움은 증오와 혐오를 낳기 때문이다. 그말인즉슨 미움이란 감정은 그 자체로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감정을 파생시킨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에 이해하려 노력하고 배려하려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왜 인류의 근친상간은 범죄이며, 동물의 이런 행동과 관계는 왜 난잡하거나 죄로 여겨지지 않는가? 그것은 동물은 이런 행동이 난잡하다는 것을 알기 위한 충분한 이성이 없으므로 이런 행동이 동물에게는 도덕적으로 문제되지 않지만, 인간은 이성이라는 기능을 부여받았고 나아가 이성은 그 의무에 따라야 하므로 근친상간이라는 행동은 인간에게는 바로 죄가 된다. 내 물음에 대해 이와 같이 대답한다면, 나는 이 대답은 분명한 순환논증이라고 응수할 것이다. 이성이 이런 부도덕성을 지각할 수 있기 전에, 부도덕성이 존재해야만 하며 따라서 그 추잡함은 우리 이성의 결정과 무관하고, 이성이 결정한 결과라기보다는 이성이 결정할 대상이라는 것이 더욱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 체계에 따르면 모든 동물은 저마다 감각기관과 욕망 그리고 의지를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덕과 부덕 때문에 인간 존재에게 칭찬과 비난을 쏟게 되는데, 바로 이런 덕과 부덕이 모든 동물에게 있어야 한다. 인류의 우월한 이성이 이런 덕과 부덕을 발견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고, 덕과 부덕을 발견함으로써 비난과 칭찬을 증대시킬 수도 있다는 것만이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발견은 여전히 이런 도덕적 구별을 규정하는 별도의 능력을 상정하며, 이 능력은 오직 의지와 욕망에 의존할 따름이고, 이성은 그것을 사유에 의해 식별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실제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505-506p 제3편 도덕

제1부 일반적인 덕과 부덕

1.도덕적 구별의 원천은 이성이 아니다.

근친상간은 인간이 유전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명사회에 들어서면서 생겨난 관념이다. 과거 인류는 족내혼을 했다. 권력의 세습을 위함이었는데,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유전기제가 변했다고 말하기에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도덕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하며 자리잡은 인간의 관념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다. 동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에게만 그 잣대가 적용되는데 흄은 이것을 덕과 부덕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 정신의 주요 원천 또는 인간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주요 원인은 쾌락과 고통이다. 이런 감각적인 감정이 우리의 사유나 감정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대개 정서도 느낄 수 없고 행동할 수도 없으며, 욕구나 의욕 역시 보나 마나 불가능해질 것이다. 쾌락과 고통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정신의 운동을 전진시키거나 퇴보시킨다. 쾌락과 고통이 정신의 상황을 변화시킴에 따라서, 즉 쾌락과 고통이 개연적이거나 비개연적이 되고, 확실하거나 불확실하게 되며, 또 당장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간주됨에 따라서, 앞서 말한 정신의 전진과 퇴보 운동은 의욕, 욕구와 혐오, 비탄과 기쁨, 희망과 두려움 따위로 다양화된다.

620p 제3편 도덕

제3부 그 밖의 덕과 부덕

1 자연적 덕과 부덕, 그 기원에 대하여

마약에 자꾸 손을 대는 이유는 쾌락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확실하게. 정신의 깊은 곳까지 자극하기에 놓지 못하는 것이다. 성관계도 마찬가지다. 쾌락이 있기에 인간은 놓지를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마약을 하고서 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그 쾌락은 인간이 미칠 정도의 수준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쾌락이 느껴지기에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사람은 동기를 잃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아프더라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파생시키기에 고통은 인간의 정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거다.

읽어도 읽어도 점점 어려워지는 이 책은 그의 다른 저서를 읽고나서 찾는 것을 추천한다. 그의 다른 책의 기본이 되는 기본서이기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뿌리를 찾는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하지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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