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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지성과 영성의 만남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스승의 스승, 멘토의 멘토에게 길을 묻다 ​/ 어떤 삶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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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스승의 스승, 멘토의 멘토에게 길을 묻다

지은이 : 이어령, 이재철

펴낸 곳 : 홍성사

펴낸 날 : 2012-06-11

※ 질문자

먼저 이어령 선생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뭐냐. 이렇게 질문드리면 정말 막연하기 짝이 없지만, 교육계에 오래 계신 경험에 비추어 이 교육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이어령

제가 교회에 와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만, 성경에 참 명쾌한 대답이 있어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이것이 교육의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달라고 하는 게 먼저고, 주는 게 나중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이가 달라고 하지 않는데도 줍니다. 그러니까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뱀을 주고,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는 교육이 돼버렸어요.

아이가 정말 갖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어른들은 아이가 싫어하는데도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고 있지요. 교육이라고 할 때 '가르칠 교' 자는 가르친다는 뜻이 아닙니까? 가르침의 반대는 뭐예요? 배움이죠. 그러면 교육이 가르치는 거냐, 배우는 거냐? 교육을 가르치는 쪽에다 두니까 문제가 생긴다 이거죠. 배우는 쪽에 두고 교육이란 ‘배우려 하는 욕망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풀립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겁니다' 하고 얘기하기 때문에, '교육' 하면 학원이 먼저 떠오르고 학교가 떠오르고 여러 가지 제도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배우고 싶은 본능,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밝아지기 위해 뭔가 배우려고 하는 습, 습이 중요하지, 교육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게 교육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학습에 대한 것이라면 말할 수 있습니다.

※ 이재철

맹모삼천지교에 대해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는 데요. 맹자 어머니가 일부러 자기 아이를 공동묘지 옆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몇 년을 살면서 아이에게 죽음을 가르쳐 줬다는 것이지요. 죽음을 모르고는 이 세상에서 뭘 배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맹모가 아이를 데리고 일부러 시장 옆으로 간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 현장을 모르고는 배우는 것이 다 추상적인 논리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알게 해주고, 생존 현장을 알게 해주고, 그다음에 학교에 가서 자기가 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배워야 될 것인지를 알게 하고 공부하게 해줬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그 어머니가 지혜로운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2강 교육 무엇을 왜 배우려는 가 61-63p

 

관심이 있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 기본 소양 교육은 갖추되, 흥미 위주의 학습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배우지 않는다. 부모님이 가수인 경우, 보통 자녀들이 가수를 희망한다. 부모의 유전 때문이 아니다. 부모가 노래 하는 것을 보니, 엄마 아빠는 노래부르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릴적부터 부모 따라서 자신도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혹은 자라면서 친구가 하는 것을 보며 따라하다 보니 흥미가 생겨나기도 한다. 거기에 맞춰 배움이 될 때 자녀의 성장 잠재력은 더욱더 증가한다. 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지교에 대한 이재철 목사의 해설은 “기본 소양교육은 부모가 해야된다.”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쉬울 거다. 삶에 있어 갖춰야할 마음가짐은 학교에서 만들어질 수가 없다. 1차 사회화 과정은 가정에서 이뤄진다고 학자들이 말하지 않는가.

※ 이어령

하나 더 예를 들게요.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증기기관을 어떻게 만들었나 하는 것입니다. 백이면 백 모두 그가 주전자 뚜껑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 그렇게 믿고 계시죠? 엉터리 얘기예요. 제임스 와트 이전에는 증기기관이 없었을까요? 있었거든요. 광산에서 수증기와 실린더를 이용해 물을 퍼 내는 양수기를 뉴커먼Thomas Newcomen이 만들었어요. 이것이 잘못 가르쳤다는 증거입니다. 제임스 와트가 주전자 뚜껑을 보고 증기기관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주전자 뚜껑만 보고 다니는 거예요. 이렇게 가르쳐 보세요.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만들어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는데 그전에는 증기기관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질문을 통해 아이가 찾아보게 하는 거예요. "증기기관이 이미 있었어요. 당시 100대나 있었는데, 주전자 뚜껑을 보다가 만든 게 아니에요.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수리하다가 '이렇게 개량하면 좋겠다' 해서 만든 거예요." "그래? 그러면 뉴커먼 전에는 증기기관 이 없었을까?" 아이가 또 찾아보는 거예요. "아, 있네요. 프랑스의 파팽Denis Papin이라는 사람이 있네요." “그래? 그 이전에는 없었니?" 물으면 아이가 막 찾아보다가 “있었네요. 2천 년 전 헤론 hero of Alexandria이 수증기 그림까지 그려놓았네요”을 대답해요. “그래? 2천 년 전에는 왜 제임스 와트 처럼, 뉴커먼처럼 만들지 못했을까?” 이렇게 자꾸 묻는 게 천재를 만드는 길입니다.

2강 교육,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77p

 

 

이 대목은 그의 다른 저서 지우개 달린 연필에서도 등장한다. 창조는 물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현재 각광받는 것들을 살펴보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인 경우가 있다. 하지만 빛을 발하지 못했다.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어야 한다. 스마트폰의 보급에 있어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한국은 한동안 아이폰의 수입을 막았다. 그렇게 갤럭시가 등장했다. 경쟁 구도가 생겨나니 스마트폰의 가격은 안정화를 이뤘고 성능도 상향 평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 10년 걸렸다.

왕발통과 같이 배터리로 가는 이동수단도 한참 전에 만들어졌다. 그때는 전기가 지금보다 더 소중했고, 발전량이 크지 못했기에 한계가 명확했다. 개인형 이동수단으로 자리잡기까지 20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불과 5-6년 전만해도 공유 킥보드는 생각도 못했다.

>이재철 목사는 핀란드의 교육을 따라가면서도 반면교사 진면교사를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를 면밀히 지켜보면서 아이가 원하는 교육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신앙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서로가 왕래하지 않고 살며 외로움과 조울증 그리고 알콜 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신앙을 따라 참된 교육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하자고 뜻을 모았던 것을

※ 이어령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주로 암기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아 졸음을 잘 참는 사람입니다. (웃음) '삼당사락'이라고 하면서 누가 덜 자느냐 경쟁하니 불면증 걸린 사람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이거예요. 제가 강연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늘날 같은 이런 입시 풍토면 저는 절대 서울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우선 저는 전 과목을 잘하지도 못했고 밤 에 잠이 오면 그냥 자는 성격이에요. 그때는 한국전쟁 당시니까 지금처럼 학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참 다행으로 생각해요. 가르쳐 준 사람이 없고 별로 안 배웠기 때문에 내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이 나이에 돌아다니면서 절대로 이렇게 강연하지 못했을 겁니다. 요즘 차량용 GPS가 있어 오히려 밤낮 길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머리로 운전하면 왜 길을 잃어버리겠어요? 마찬가지로 학교 선생님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내 머리는 죽는 거예요. 바보 같은 선생이 제일 좋은 선생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용기를 줘야 합니다.

저는 오형제었는데 형들하고 늘 얘기했어요. 대학생인 형과 초등학교도 안 간 아이가 맞서서 토론을 했어요. 형들이 재밌으니까 약을 올리면 나는 막 덤비는 거예요. 그렇게 대학생 수준의 사람들과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하다 보니 머리가 발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포가 막 증식하는 거죠. 또 대학생들이 보는 어려운 책을 읽으니 모르는 부분이 많아 내가 추측해서 알아보 는 거예요. 사전이 있었겠어요? 이렇게 독학을 시켜도 부모님이 잘 이끌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과학 같은 것은 절대로 독학으로는 안 됩니다.

그런 건 암기도 하고 대학에서 실험도 해야 하는 과정이 절대적입니다. 이공계는 그렇지만, 인문학이나 혼자 생각해야 하는 분야, 해답이 꼭 하나만 있는게 아닌 것은 부모가 가르치면 돼요. 그러려면 부모가 아이의 적성이 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켜 보니 도저히 학문할 아이는 아니다. 그러나 장사는 잘할 것 같고 대인 관계도 좋으니 정치도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되면 아이를 학원에 보낼 돈, 대학 수업료 낼 돈을 전부 미리 계산해 보세요. 그리고 그 돈을 은행에 넣으세요. 좌우간 학교는 보내지 않아도 그 돈으로 장사를 시키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공증인을 걸어 두세요. 설령 나중에 아이가 그 돈을 탕진하더라도 탕자는 돌아옵니다. 그러면 그만큼 인생을 배워 오지요. 이렇게 아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아이도 편안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편안해집니다.

절대 재치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진지하게 권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아이가 천재인 줄 알고 자꾸 비상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보통 아이들보다 수준이 낮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만 참으시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하다못해 제기차기라도 아이가 좋아하는 거 하나만 시키세요.

2강 교육 79-81p

 

말을 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두뇌의 활동성이 증가하고 배움의 효율이 높아진다. 암기식 교육은 사고활동을 막는다. 컴퓨터에게 값을 단순입력하는 것을 왜 인간에게 하려는가.

같은 문제를 놓고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건 인간만이 가능하다. 인공지능은 주어진 값에서 도출된다. 여러가지 분야를 조합해서 하나의 관점을 만들어내며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토론의 장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단순히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비난하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형태가 현재의 토론 방식이다. 이기고 지고의 경쟁론을 대입하니 생겨나는 문제다. 학교에서 하던 짓을 고대로 하는 거다.

※ 질문자

부부는 죽으나 사나 함께해야 부부인데, 우리가 중동에서 땀 흘려 돈 벌어야 하는 시절도 아닌데, '기러기 부부’로 떨어져 살면서 아이들에게 목숨 걸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것은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 아닙니까?

※ 이어령

이 주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신학자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 고,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런데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건 붙잡고 있고, 바꿀 수 있는 건 놔두고 있어요. 아이를 잘 살펴보고 '이 아이는 학문을 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판단되면 겸허히 받아들이세요. 아이를 교육시켜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끝까지 용기를 가지고 교육시키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 무엇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무엇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이 돼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누가 그 일을 해주죠?

그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정 안 될 때 마지막으로 가는 데가 교회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믿는 분이라면 니버의 기도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과학으로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오만 때문에 오늘날 지구가, 학교의 모든 제도가 이 모양이 된 거 아닙니까.

[•••]

기러기 가족이 되는 건 가족을 파괴하고 붕괴시키고 아이를 힘들게 하고 배우자에게 몹쓸 짓을 시키는 거예요.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가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 하고 전화를 거니까 아버지가 "응, 엄마 바꿔줄게" 그래요. "아버지하고 애기하려고요" 이랬더니 아버지가 뭐라고 해요? "어? 돈 떨어졌냐?" 하죠. 아버지와 얘기할 게 돈밖에 더 있어요? 아들이 "그게 아니라 아버지,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했더니 아버지가 "너 술 먹었냐?" 그래요. (좌중 웃음) 이게 오늘날 부자지간이에요.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해도 사실상 기러기 아빠나 마찬가지에요. 가정교육을 통해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어머니는 어머니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아이들이 '나는 아버지처럼 될 거야’, '나는 어머니처럼 될 거야’ 하고 생각하도록 부모가 먼저 바른 교사가 되면, 비록 아이가 학교 교육에서 실패한다 해도 한 인간으로서는 바로 설 수 있지요.

가정은 쉬는 곳이고 믿는 곳입니다.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은 교육장이에요. 아이가 '난 커서 절대로 아버지처럼 안 될 거야' 하는 것도 교육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 붕괴하면 공교육이 봉괴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 붕괴하는 순간 교육이 끝나는 거에요.

인간과 똑같이 생긴 크로마뇽인이나 네안데르탈인이 왜 사라졌는지 최근에 밝혀졌는데, 교육받을 기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부모가 일찍 죽어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의 행동을 학습하지 못한 겁니다. 학습해야 생존하는데 말이죠. 네안데르탈인처럼 오늘날 아이들이 부모에게 교육받지 못하면 인류의 자멸을 가져옵니다. 아무리 교육이 중요하다 해도 가족끼리 헤어지거나 가족이 붕괴돼서는 안 됩니다.

제 딸이 변호사를 하고 있는데, 딸이 말하기를 비행청소년 열이면 열 모두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왜 그때 아버지가 안 된다는 말을 안 했을까. 그게 원망스럽다. 작은 잘못을 했을 때 아버지가 꾸짖었다면 난 이렇게 안 됐을 텐데. 아버지가 그냥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것이 ‘아버지 없는 사회’입니다. 교육의 가장 큰 역할을 아버지가 해야 하는데, 모든 교육을 어머니가 맡고 있거든요. 여성들이 교육을 담당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 역할이 합해짐으로써 비로소 가정교육이 시작되는 것인데 아버지가 교육을 전적으로 어머니 손에 맡긴다든지, 또는 기러기 가족이 되어 떨어져 산다든지 하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2강 교육 / 기러기 가정이라는 덫 / 87-90p

 

위 내용은 그의 다른 저서에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종교에 대해서 무심할 때도 키에르케고르와 니부어의 책을 즐겨 읽었어. 철학적이거든.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하도 어릴 때 읽어서 잘 기억나지 않네만, 니부어의 기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살다 보면 기도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찾아오기도 하지 않은가. 그럴 때 나는 니부어의 이 기도문을 외우곤 한다네."

변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변할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 그리고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슬기를 허락하소서.

유쾌한 창조 /알마 /4장 프리즘에서 나온 이어령의 기독교 262p

 

 

이어령 선생은 니부어의 기도문을 종종 외곤 했다고 한다. 문구가 마음에 들었던 거다. 종교적 색채보다 철학적 면모가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는 마음,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용기, 그걸 구준할 줄 아는 안목을 갖는 것. 어디에도 종교적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어령 선생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문장이었던 거다.

어찌됐건, 아이의 교육을 위해 가족이 분리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국어”란 무엇인가. 엄마의 말이다. “엄마”라는 단어를 먼저 떼게 되는 언어를 말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말이 모국어일 수밖에 없다. 부모가 한국인인데 어떻게 영어 먼저 입을 떼겠는가. 부모를 보며 인생을 처음 배운다. 부모는 아이의 전부이다. 아이의 세계관에서 부모는 절대자와 같다. 그런데 그 절대자가 없이 살아간다면 아이는 불안하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고 부터는 아이는 불안이란 감정과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중화하기 위해 아이는 어미의 젖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미의 등에 업혀 안정을 취하는 것이다.

부모가 영어와 일본어, 스페인어와 같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두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학습하기 때문에, 부모가 할 수 없다면 아이도 할 수 없다. 친구들을 통해 배우더라도 정서적 안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기에, 삶에 있어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데 어찌 정서적으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부모로부터 떨어진 유기묘를 보며 불쌍하다 느끼면서 왜 인간에겐 같은 잣대로 보지 않는 것인가.

부부간에 정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식회사 주주들처럼 이해 관계만 따질 것 아니겠어요? 가령 예를 들어서, '당신과 내가 결혼했을 때에는 당신 봉급이 30만 원이있는데 지금 물가지수를 따져보니까, 또 아무개 아버지랑 비교에 보니까 지금 월급으로는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소. 이러니 나는 애초에 당신 봉급을 보고 왔는데 이제는 헤어질 수밖에 없소” 라고 한다면 참 합리적이지요.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 / 정과 달빛의 문화 / 206p

 

 

부부끼리도 마찬가지다. 기러기 가족이 된다면 가족의 존속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첫 명분은 아이의 교육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교육을 가장하여 돈만을 요구하는, 정이 사라진, 돈의 논리만이 남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돈의 논리, 피의 논리가 온전히 섞여 정의 논리로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이어령 선생님은 연필과 원고지로 돈을 버신 걸로만 따져도 대한민국에서 으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강남에 사신 적이 없네요. 아마 강남에 사셨으면 집값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평생을 집값이 잘 오르지 않는 동네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계세요. 왜 그러셨습니까?

※ 이어령

우리나라 집값이 비싸다고 했는데, 그 원인이 정책이 잘못되어서인 것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의 특이한 주택관 때문이에요. 외국의 경우에는 전세 들어 살거나 대부분이 셋집에서 삽니다. 자기 집이라도 보통 대출금을 얻어 살기 때문에 그 돈을 매월 은행에 갚으니, 그 집은 사실 은행이 소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소유하는 것보다 집에서 사는 사용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집을 사용가치로 여기지 않아요. 사는 장소로 보지 않고 일종의 재산으로 보거든요. 그래서 집을 '장만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 중에 재미난 게, 장만한다는 말이에요. 옛날에는 자동차 는 말할 것도 없고 냉장고 사는 것도 장만했다고 했어요. 대개 집을 산다는 것은 내 거처를 마련한다는 의미보다는 '내 재산을 만든다. 그러면 집값은 오르기 마련'이라고들 생각해요. 이러니 집값이 올라갈 수밖에요. 가진 사람들이 전부 투자하는데 내려갈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막 주택정책을 써서 사람들이 집을 갖게 되면 상대적으로 집값이 떨어집니다. 집값이 떨어져 좋아하는 사람 즉 집 없는 사람과 집값이 떨어져 한숨짓는 사람 모두 똑같은 한국 사람들이죠. 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몸집 좋다'라고 할 때 '몸집'이라는 말은 몸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칼집이라는 말도 있는데, 집이라는 것은 한번 들어가면 하나의 작은 공간을 만들죠. 이런 맥락에서, 저는 매달 세를 살다가 어느 순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주거라는 집 개념을 갖게 되니까 지금 당장 집값이 오르는 집이 아니라 일터에서 가까운 집을 사게 되었죠. 저는 집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불린다, 증식시킨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집을 하나의 재산으로 장만하고 돈을 벌 목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은 자기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금고 속에서 사는 것이죠. 내가 집이 무엇인지 안 것은 내 집이 아니고 남의 집에 살 때였어요.

3강 사회 집에 대한 관점 118-119p

 

 

집은 편안함을 갖는 곳이다. 가족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따뜻함을 가져야 할 공간이다. “home”과 “house”를 보라. 노숙자를 보고 “homeless”라고 한다. 단순히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안식처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집이란 단순히 몸이 머무는 것이 아닌 영혼,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집이 화폐가 되었다. 내부 구조가 똑같다보니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인 집은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이니 롯데캐슬이니, 아이파크니 브랜드를 따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사용가치를 따져야 하는데 돈의 가치로 따지고 들려 하니 집의 개념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오늘이 지성과 영성의 만남, 마지막 대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먼저 이어령 신생님께 여쭙습니다. 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영성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 이어령

[•••]

내가 정말 옳았던 거냐? 더 깊이 알고 보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림 내가 지성에서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지성을 가졌기 때문에 마치 순교자처럼 수난 받아 가면서 이 사람들이 날 박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영성으로 가면 '그래, 내가 몰라서 박해받은 거야. 사실 내 지성이라는 게 별게 아니었어'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억울해하며 내가 옳고 저들이 틀렸다는 그런 오만이 없어지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면 영성은 인간의 지적 오만을 넘어서는 어떤 힘, 그 앞에서 내가 오만해질 수 없는 힘입니다.

8강 종교 영성과 지성 333p

 

 

지적 허영심은 오만을 낳는다. 끝없는 지적 갈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만심을 만들어내게 하는데 옳고 그름에 맹목적으로 빠지게 되어 선악론이니, 행위론이니, 정의론이니 하는 것을 따지게 된다.

지적 오만을 넘어 지성을 탄생시키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갈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의 존재를 명확히 받아들일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체득하지 못한다. 이해는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이다.

영성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어령 선생을 보면서 우리는 그걸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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