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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먹다 듣다 걷다 :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지금이 터닝포인트다. 교회의 마지막 터닝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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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먹다 듣다 걷다

: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은이 : 이어령

펴낸 곳 : 두란노

펴낸 날 : 2022년 03월 23일

저는 습관이 안 되어 식사 기도를 잘 잊어버립니다. 거의 70년 동안 기독교와 관계없이 살았으니 잘 안 됩니다. 식전 기도를 깜빡해 지금도 곧잘 기도 없이 먹어요.

그러면 집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가 꼭 한마디 합니다. 당신 그리스도인 맞아요? 저는 지기 싫어 식전 기도는 잘못된 것 이라고 대꾸합니다.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기도를 하냐고, 다 먹고 맛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답해요. 그래서 식전 기도가 아니라 식후 기도를 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 인간적인 생각이지요.

28p 제1부 먹다. 먹기 위한 기도

 

 

이 대목은 이후 저서인 당신 크리스천 맞아?에도 등장합니다. 2008년도 명성교회 간증에서 했던 말입니다. 지적 호기심에 사로잡혀 살았던 인생이었기에, 영성에 대해서도 본능적으로 반박하려 했습니다. 간증에서는 요즘 그 마음을 느끼고 있다며 대답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그걸 넘어서 체득한 것은 결이 사뭇 다릅니다. 왜 “체득”일까요.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몸이 받아들였다는 건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에요. 들리는 건 그냥 들릴 뿐입니다.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머리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아들었다는 것은 단순 이해를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영성에 대해 그도 이제 알아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걸음마를 뗀 것이죠. 다만, 지적 호기심에 사로잡혀있던 날이 지금껏 살아온 날이며 살아갈 날보다 더 많았기에 적응기를 거치시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배가 고파 식기도를 안 하고 숟가락을 먼저 들었더니, 집사람이 “여보, 당신 또 식기도 안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럴 때는 제가 "아이쿠, 내가 잊었어. 미안" 하고 솔직히 말을 해야 하는데, "아냐, 식기도는 다 먹고 난 다음 감사드리는 게 진짜야. 먹어보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외치는 거, 그거 다 위선이야" 이랬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이 저와 50년 넘게 살았는데 절 모르겠습니까. "그 변명하고 둘러대고, 그런 지적인 조작! 머리 굴리는 거! 그거 여전히 못 버렸군. 그거 하나님이 다 아셔요" 하더군요.

제가 그런 거짓말을 할 때는 표정이나 목소리부터 달라 지거든요.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니 거짓말탐지기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시기 전에 이미 나 자신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영성이고 심성이면서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밖에 있지 않습니다. 믿으면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전 뼈저리게 느낍니다.

당신 크리스천 맞아?/열림원/49p 2.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명성교회 간증, 2008년 12월 14일 中

먹는 것은 먹는 대상을 없어지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과를 먹기 전에는 보기도 하고, 향긋한 냄새도 맡고, 먹으면서 아삭아삭 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리잖아요.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자인 클라우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에 따르면, 사랑에 관한 성적 용어는 동서고금 전 세계를 막론하고 전부 먹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어권에서 '허니'라고 부릅니다. 미각이 동원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기분 나쁜 비유만이 아닙니다. 그만큼 먹는 것은 '하나가 된다','일체가 된다'는 뜻이거든요.

상대방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져 볼 수도 있을 때는 여전히 밖에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 상대를 먹어 버리면 자기속으로 들어와 하나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에서 가장 가까운 감각이 미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1p 제1부 먹다 최후의 만찬과 혼밥

 

 

성(性)적인 말로 “먹었다” “맛있다”는 비속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만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먹을 수 없다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비싼 한약을 지었더라도 내 몸에 맞지 않아 먹을 수 없다면 건강해질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알기 위해 인간은 미(未)각의 표현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만큼 먹는 것에 진심인 나라는 없을 겁니다. 조선 후기 이후로 그 경향이 더 강해졌죠. “식사 하셨어요?” “조만간 밥 한 끼 하시죠.”라는 표현은 안부로 사용되며, 좋은 일이 생기면 “달달하네” “꿀이네” 심지어 “맛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전에는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기존의 표현을 가져와 은어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미(未)각을 미(美)각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의 혀는 단맛과 짠맛, 신맛과 쓴맛 그리고 감칠맛 다섯 가지의 맛을 느낄 수 있죠. 먹을 것이 중요했던 지난 날 우리에겐 맛이 곧 미(美)였던 것입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마태복음 26장 26절)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

 

예수는 왜 빵을 떼어주며 내 몸이라고 했으며, 포도주는 자신의 피라고 했을까요? 말이 안 됩니다. 포도주는 진한 검붉은색입니다. 피는 살짝 검은기가 도는 붉은 색이죠. 엄연히 다릅니다. 구성성분도 다릅니다. 헤모글로빈도 없고, 철분도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이해시키고자 한 말이었습니다. 먹고 마셔야 받아들이는 인간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죠.

점심 먹기 전 면접자보다 점심이 지난 오후 시간의 면접자가 합격할 확률이 높은 연구결과처럼, 인간은 무언가를 먹고 나야 포용력이 더 넓어집니다. 굶으면서도 인내와 포용을 갖춘 자는 없습니다. 공복 앞에 성인군자는 없어요. 부처가 상징적인 인물이 된 것은 인간의 특성을 거스른 유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는 동사 '듣다'가 '이해하다'와 같은 단어예요. '엉 떵드흐 (entendre)가 듣고 이해 한다는 동사입니다. 물론 '듣다'의 물리적인 행위로 '에꾸떼' (ecouter)가 있고, '이해하다'의 동사로 콩프렁드 흐'(comprendre)가 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듣는 행위가 이해하는 행위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 프랑스어의 관점인 듯합니다.

우리말도 '이해하다'는 '듣다'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말 알아들어?" 하게 되면 접수했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듣기는 들었지만 알아들은 경우도 있고, 못알아 들은 경우도 있겠지요.

사실 우리말은 아는 것 자체가 모호한 인지 영역이기는 합니다. '알다'의 반대 개념으로 '알지 않다' 대신에 '모르다' 라는 독자 영역이 있습니다. 덕분에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가 존재합니다.

영어에서는 '알았다' '접수했다'는 뜻으로 'I see’를 사용 합니다. 그들에게는 보는 것이 알아듣는 비결입니다. 우리 말에서 '보다'라는 말 자체는 판단 유보의 성격이 강합니다. '들어 보다', '봐 보다' '해 보다' 처럼 다른 말 뒤에 붙으면 '시도해 본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요. 즉 우리말에서는 '보다'가 행위가 되려면 의지가 필요합니다. 결국 영어는 시각만으로 ' 이해하고 접수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그에 비해 우리말이나 프랑스에는 청각을 통해 이해하는 개념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87-89p 제2부 듣다 듣는 것과 아는 것

 

들리는 건 들립니다.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건 눈을 감는 것으로 회피할 수 있습니다.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말과 글입니다. 하지만 태초에 글은 없었습니다. 말이 태어나고 글은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그말인즉슨 듣는 것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원초적인 방법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보는 것만으로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넷 강의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강의가 활성화되었던 시기에도 현장강의를 들으려고 몰리는 이유는 왜일까요?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한 가지의 감각으로만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듣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느껴야 하죠. 청각->시각->촉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느껴봐야 안다고 흔히들 이야기 합니다. “느껴봐야 정신차리지” 와 같이 우리는 촉각을 통해 인지과정을 지나봐야 그때서야 알아듣기 시작합니다.

부처는 세상에 태어난 지 35년, 도를 찾아 출가한 지 6년째 깨달음을 얻기까지 갠지스강을 숱하게 걸었다고 합니다. 그 전통을 따라서인지 오늘날 불교에서도 걷기를 통해 명상이나 수행을 합니다.

4대 성인들뿐 아니라 인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 중에 걷기를 사랑한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특히 철학자들과 종교인, 예술가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와 니체가 그러했고, 아르튀르 랭보와 레프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걷는 것은 그만큼 자기와 대화를 하게 하고, 생각을 확장시키며, 또한 창의적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걷기의 힘입니다.

140p 제3부 걷다 성인들이 걸었던 길

 

 

이어령 선생은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책의 제목인 먹다 듣다 걷다로 설명했습니다. 예수가 제자에게 포도주와 빵을 먹였던 것처럼 말이죠. 존 스튜어트 밀은 매일 아침 오솔길을 아버지와 걸었다고 합니다. 이때 전날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에게서 지적 영감을 많이 얻고 영향을 받았다고 하죠.

걷는 것은 두뇌를 자극하는 일입니다. 뇌신경은 교차하며 서로 교류하고 창의적인 생각과 독창적인 표현들은 이 과정에서 종종 탄생하곤 합니다. 생각한다는 건 뇌의 신호가 교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교류를 위해선 걸어야 합니다. 걷다보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은 창조를 낳습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걸어야 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걸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상생의 길이요, 생명으로 가는 변화와 확산의 길입니다.

170p 제3부 걷다 기도 걷기

 

많은 이들이 종교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조차 그렇기 때문이죠.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 덕분에 저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 커졌습니다. 오만하고 경솔한 발언을 일삼고 정치화, 세속화 시키는 몇몇 대형교회와 자질 없는 이들 덕분입니다.

단 위에 서게 되면 인간은 괜스레 우쭐해집니다. 공간의 효과입니다. 어릴 적 학교 교실을 보면 교단이 있었죠. 이때는 몰상식한 인간이 많았습니다. 촌지를 받으면 해당 학생에겐 상냥하게 대했고, 가난해 촌지를 낼 돈이 없던 학생에겐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안들면 학생을 교단 위로 올려 때리기도 했습니다. 다수의 학생들에게 강한 공포심을 주었던 것이죠. 단 하나 올랐을 뿐인데, 사람이 달라집니다.

요즘 학교는 어떻습니까. 교단이란 것이 없어요. 대학교엔 강단이 있지만, 위에서 학생들이 내려다보는 구성의 공간도 존재하며 중고등학교의 교실보다는 다양성을 띕니다. 어찌됐건, 단이 있고 단상대까지 있고 마이크까지 있는 곳에는 권력이 서려있습니다. 마이크는 한 사람이 멀리, 널리 퍼트리는 장치입니다. 위압을 주기 용이하며 선동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 공간에 서서 정치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뜻과 다른 자를 향해서는 악마라며 힐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종교인들을 세뇌시키며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앞장서 나서곤 합니다. 쓰레기에요.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를 빌어 멍청한 논조의 주장을 공공연히 내뱉습니다.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불교도 그렇고 여타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걸었던 것처럼 순례길에 오르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는 고생길을 택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도마에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었고,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도 참회하게 만들었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본인들이 믿는다는 예수는 그랬는데, 정작 본인들은 무엇을 했나요? 다수를 대상으로 자신의 쓸데없는 정치 신조나 세뇌하며 헌금과 십일조를 뜯어내는 양아치 짓거리나 하고 있지 않았나요? 현대판 조직폭력배입니다. 게다가 합법적이죠.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했으니까요.

정치화 • 세속화된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합법적 노예제도일 뿐입니다. 매주 일요일 참석하게 만들며, 철야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부활절이라고 찾아오게 만들어놓았어요.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1년치 급여가 대기업 임원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게 과연 맞는 일일까요? 그러고선 하는 일이 무엇이죠? 이상한 말 한마디 몇 번 내뱉으며 아멘. 나는 나다울 때 아름다운 것처럼 종교도 종교다울 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은 무엇이죠? 추한 것입니다. 추하고 더럽습니다. 추하고 더러운 것이 되어서 될까요?

머리가 달렸고 생각이란 걸 한다면 반드시 이 점은 돌이켜보며 곱씹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도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종교가 무너진다는 건 문명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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