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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 젊은 우리가 한국문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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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지은이 : 이어령

펴낸 곳 : 문학사상

펴낸 날 : 2009년 01월 15일

선비들이 문장을 겨루고 이념을 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이나 예술은 사람의 주관이나 지식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달라지는 것으로 승패의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판단이라는 글자 자체에도 나타나 있듯이 '판判' 이란 칼로 반을 자른다는 뜻이다.

칼은 붓보다 언제나 분명한 것이다. 붓으로 싸우는 선비들의 승부는 칼로 싸우는 무사들의 그것처럼 확실치가 않다. 칼은 승부를 분명히 가른다. 칼로 겨루는 싸움에서는 진 자가 이긴 자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잘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들의 글싸움은 상대가 승복하지 않는 한, 그 우열을 판가름하기 어려운 것이다. 서양 문화의 기층에는 기사도의 칼이 있다. 일본도 무사도라는 칼의 문화가 역사를 지배해 왔다. 길고 짧은 것을 금세 대어볼 수 있는 분명한 승부의 세계가 있었다.

또 장사하는 사람들이 쓰는 저울이나 자 역시 분명한 것이다. 한 치의 눈금도 틀리지 않게 어느 것이 길고 짧은지를 가려낼 수 있고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가를 밝혀낼 수가 있다. 무인들이 쓰는 칼이나 상인들이 쓰는 저울은 다 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은 단순하고 구체적인 데서 나온다. 칼과 저울의 문화는 어렴풋한 그늘을 용서하지 않는 문화다.

경쟁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이런 단순성과 구체성이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추상적인 붓의 문화가 발을 들여놓을 땅이 없다.

젊은이여, 바람을 보았는가 / 확실한 승부 / 80-81p

 

 

우리가 근대화에 느렸던 이유는 문화 때문이다. 문신이 지배했던 조선에서는 붓의 문화가 꽃피었다. 정몽주와 이방원의 시조 배틀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결국 뜻대로 안되니 칼을 들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는가. 글은 추상적이다. 말을 종이에 옮기기 위해서 함축될 수밖에 없다.

이방원은 정몽주에 비하면 단순했던 사람이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칼의 문화가 더 어울렸다. 형제의 난을 일으켰던 것도 그렇다. 아버지를 닮아 추진력이 있었다. 생각하고 차분히 글을 쓰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성격이 맞았다.

행동파였던 자신과 달리 아들인 세종은 글을 사랑했다. 때문에 자신의 아들에게 문(文)의 시대를 열게 만들었다. 그 뒤에서 자신은 아들이 글로써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게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세종대왕을 기점으로 조선은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중간중간 문화가 흔들리고는 했지만 말이다. 이방원을 많이 닮은 세조라던가, 연산군이라던가, 인조라던가.

어찌됐건 조선의 기조는 붓이었다. 그래서 무신이 설 자리가 없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 여러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문화국가”는 당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앞서갔다. 붓으로 칼을 어찌 막을 수 있었을까. 불가했다. 그래서 우리는 약탈당했다. 수많은 아녀자들과 남자들이 칼에 베였고, 청나라로 여자들이 팔려갔고 세자까지 청나라로 잡혀가지 않았는가.

세계가 칼의 문화로 서로 경쟁할 때 나홀로 붓을 휘날리던 꼴로 우리는 크게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침략을 당해야만 정신을 차리는 건 붓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전쟁. 꼭 맞아야 정신이 번쩍드는 것이 우리 한국인의 특징이다.

골을 먹혀야 그제서야 이를 악물고 뛰는 축구팀을 봐도 화낼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늘 그래왔던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그 공동의 자리를 우리는 '판'이라 불러왔던 것이다. 윷이 있으면 윷판이란 것이 벌어지고, 화투가 있으면 화투판이 벌어진다. 굿을 하면 굿판이, 씨름을 하면 씨름판이 생겨난다. 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그때그때 모이는 사람과 목적에 따라 판은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판은 절대로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판은 개인보다 언제나 우선하는 집단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노름판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돈을 걸고 눈을 붉히고 있지만, 그 돈은 개인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판을 가능케 하는 판 전체의 돈, 즉 판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판에 끼는 존재가 된다. 개인이 판에 끼지 않고 판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독판‘이라고도 하고 ‘판친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심한 경우에는 판을 쓸어버리는 것이 된다. 판이라는 것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판 전체의 운명이 되는 것이며, 혼자의 감정이 아니라 판 전체의 집단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혼자서 하는 일은 판이라고 하지 않는다.

동시에 판 문화는 외향성을 지닌 문화다. 판이라는 명사를 받는 동사는 ‘벌인다’다. 두말할 것 없이 닫는다. '움츠리다’ ‘오므리다’와 같은 온갖 폐쇄적인 말과 대극을 이루는 말이다. 그것은 탁 트인 바깥을 향해 나 자신을 열어 보이는 자리다. 거기에서 집단은 하 나의 동질성을 갖고 한 몸처럼 된다. 판은 벌이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넓은 자리가 있어야만 한다. 달팽이 같은 좁은 공간에서는 판을 벌일 수 없다. 그 껍질을 부수고 넓은 벌판의 판으로 나오는 개방적 문화다.

그러나 판은 획일성을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문화이기도 하다. 어떤 경향이나 세력이 한곳으로 휘쓸릴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판이라고 부른다. 시장에서 외제 물건이 범람하면 외제판이 되고,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고 소비만 하면 먹자판이 된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 있다면 그것은 개판이라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에게는 신바람이 나는 굿판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 이 세상 어떤 민족보다도 잘 놀고 일 잘하고 힘 잘 쓰는 사람이 되지만, 판이 식고 깨지면 매로도 돈으로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젊은이여, 바람을 보았는가 판의 철학 119-120p

 

 

 

“~~가 판친다”는 말은 독점하고 있음을 비꼬는 뜻이다. “아주 놀자판이네”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됐건 판이라는 개념은 우리만의 문화다. 판을 벌인다고 말하지 않는가. “일 벌리네”라고 말하는 것도 크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판이란 건 혼자서 키울 수가 없다.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 여럿 모여 공동의 행동을 일으켜야 한다.

굿판을 벌이는 것을 생각해보자. 주로 마을에 위기를 해소하고자 또는 안녕을 기원하고자 많은 이들의 뜻이 모여서 이뤄진다. 보호수 아래서 제사상을 크게 차리고 신명나게 꽹과리를 치며 살풀이를 한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긍정적인 뜻이 모여서 긍정의 판을 벌였던 것이다.

“판”이란 건 공동의 문화이다. 그러나 잘못되면 편향의 문화로 변하기도 한다. 위에 말했던 “놀자판이네”와 같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판을 잘 벌여야 한다. 때로는 윷판을, 씨름판을, 펼치며 잘 놀 줄 알아야 하고, 일판을 벌여서 즐겁게 일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결혼과 출산 관련해서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우리나라는 괴상한 판이 깔려있다. 저마다 입맛에 맞는 편향의 판에서 어우러져 놀고 있다. 덕분에 갈등과 혐오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맹목성이라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고슴도치마저 제 자식을 밉게 생각 한다면 고슴도치는 벌써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고슴도치가 고슴도치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종족의 존속 논리입니다.

그러나 그냥 사랑만 해서는 동물적인 사랑으로 끝나고 맙니다. 인간은 단지 종족을 보존만 하는 데서 만족하는 들쥐들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정교한 것이라 해도 똑같은 육각형의 집을 짓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꿀벌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과 모습을 바꿀 줄 아는 고슴도치입니다. 한국인에 대한 사랑과 창조에 대해서 가슴을 열고 서로 이야기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눈을 흘길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을 그리고 다음에는 창조를, 한 치라도 나의 키를 키우기 위해서 까치발로 서는 연습을 하자는 것입니다.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 / 문화를 읽는 법 / 163p

 

우리 것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다른 포스팅에서도 이야기 했었다.*

*나는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화도 그렇다. 우리 문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나다울 때 개성과 매력이 생겨나고 우리 문화도 우리다울 때 매력적인 문화가 된다.

정해진 틀이 아닌 우리 식대로 우리 마음대로 우리 ‘멋’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이 그 안에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감을 만들어낸다.

[독후감] 한국인 이야기: 너 누구니 젓가락의 문화유전자 / 수저에 담긴 우리의 문화 포스팅 중에서..

 

 

모든 것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다. 전통이라고 부르는 우리 옛 문화에도 추한 것도 있고 아름다운 것도 있다. 그 문화를 찾아보며 사랑하려고 하는 시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것은 우리가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도 누가 아껴줄 수 없다. 내가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문화도 그렇다. 그 어느 나라도 우리 문화를 아껴줄 수 없다. 그저 잘나보이기에 따라하고 사랑할 뿐.

아름다운 것을 취하는 노력을 우리가 나서야 한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춘향전 등 옛 우리 이야기를 가지고 연극을 하고 있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어우를 수 있게 우리도 나서야 한다.

여러분은 절대로 정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시대 착오적인 것이고, 또 합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버려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합리주의 시대일수록 이것을 살려야 합니다. 이제는 정으로 사는 사람들의 시대가 왔다. 바로 우리가 자신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정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식회사 주주들처럼 이해 관계만 따질 것 아니겠어요? 가령 예를 들어서, '당신과 내가 결혼했을 때에는 당신 봉급이 30만 원이있는데 지금 물가지수를 따져보니까, 또 아무개 아버지랑 비교에 보니까 지금 월급으로는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소. 이러니 나는 애초에 당신 봉급을 보고 왔는데 이제는 헤어질 수밖에 없소” 라고 한다면 참 합리적이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경제력을 강화하고 과학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긴장 관계를 이겨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사회는 바로 정겨운 사회를 말합니다.

일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대강대강 건성건성 하니까 우리 일본을 절대로 못 쫓아와" 한다면 천만의 말씀이지요. 지금 일본은 어떻습니까? 어린애들 자살률과 노인들 이혼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습니다. 또 젊은이들은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질환이 경장히 많습니다. 결국 일본은 정신질환자가 많아지고 자주 긴장감이 더해져서 어느 정도 가면 더 이상 성장을 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좀 느슨한 기질이 있고 정이 많은 사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시 생활을 해도, 산업 사회에 들어서도 그리 각박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전통적인 여유를 잃지만 않는다면 일본 사람들, 서유럽 사람들이 긴장감 때문에 전부 정신적인 중압감을 느끼게 되는 반면, 한국은 따뜻한 정 때문에 어떠한 중압감도 견딜 수 있는 저력과, 억 압에 대한 면역성이 있어서 그들을 넘어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옛날에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을 합해야지, 옛날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것만을 얻고자 할 때는 마치 심장을 주고 돌심장으로 바꾸어 부자가 된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 / 정과 달빛의 문화 / 206-208p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자.

옛날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것만을 얻고자 할 때는 마치 심장을 주고 돌심장으로 바꾸어 부자가 된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무엇이 떠오르는가. 은하철도999가 생각나지 않는가? 10살의 철이는 기계몸을 얻으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은하철도 999에 오른다.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부모의 몫만큼 오래 살겠다는 막연한 다짐에서 시작됐다. 살아있는 심장을 주고 기계심장을 얻을만큼 오래 사는 것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 내 것이 없는 삶인데 말이다.

살아있는 동안 영생은 없다. 하지만 기계심장을 달면 영생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 산다. 과연, 그것이 좋을까.

철이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위해 오른 열차에서 수많은 경험을 한다.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남의 위안을 위해 누명을 뒤집어도 넘어가기도 한다. 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거다.

또 서양 말에는 여자 • 남자란 말은 있어도 사람이란 말은 없지요. 참 기가 막힌 일이지요. 여자 • 남자가 반대 아닙니까! 반대 되는 여자 • 남자가 모이면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되는데 영어에선 어떻습니까? 남자는 man, 여자는 woman, 합치면 우리처럼 제3의 말이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man, woman 해놓고 사람은 또다시 man이 되어버립니다.

또 밤 • 낮은 night • day입니다. 우리말에서 낮 • 밤을 합쳐 하루라고 일컫는데, 서양 말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낮 • 밤을 합쳐놓으면 다시 낮으로 하여금 밤을 잠들게 하니까 낮이란 말이 날이 되어서 낮이라는 의미도 day고 하루라는 것도 day에요. 이처럼 우리는 낮• 밤을 서로 섞는 말이 있는데 서양에는 섞는 말이 없지요.

따져보면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서양 사람들은 끝없이 대립 개념을 앞세웠고, 우리는 대립되는 것을 한 보자기에 싸가지고 하나로 종합하고 유한하려고 하는 흐름으로 생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 / 함께 살아가는 땅 / 214p

 


이 말은 다음 저서인 “읽고 싶은 이어령”에 발췌되어 실린다.

 

서양은 동전던지기와 같이 양면성을 띈 대립의 개념이 중심이었고, 동양은 가위바위보처럼 순환 개념이 더해져 포용하는 형태가 중심이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가 이야기하던 보자기 문화도 이런 맥락이다.

대립은 경쟁을 낳는다. 서양은 한동안 칼의 문화로 근대화를 빠르게 이뤄내 식민지 문화를 낳았다. 서양의 각 국가들은 식민지를 삼기 위해 너도나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독일은 한발 늦었다는 이유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식민지를 만들 국가를 찾지 못해서 분했기 때문이다.

또 서양 말에는 여자• 남자란 말은 있어도 사람이란 말은 없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여자• 남자는 반대 아닌가! 반대되는 여자• 남자가 모이면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되는데, 영어에선 어떠한가? 남자는 맨, 여자는 우먼, 합치면 우리처럼 제3의 말이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 맨, 우먼, 해놓고 사람에는 또다시 맨(man)이 되어버린다.

또 밤• 낮은 나이트(right) • 데이(day)다. 우리말에서 낮• 밤을 합쳐 하루라고 일컫는데, 서양 말에는 그것이 없다. 낮•밤을 합쳐 다시 낮으로 하여금 밤을 잠들게 하니까 낮이란 말이 날이 되어서 낮이라는 의미도 데이(day)고 하루라는 것도 데이(day)다.

이렇게 따져보면 한둘이 아닌데, 이와 같이 서양 사람들은 끝없이 대립 개념을 앞세웠고, 우리는 대립되는 것을 한 보자기에 싸가지고 하나로 종합하고 융합하려고 하는 흐름으로 생활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읽고싶은 이어령 /여백 / Part.3 명상 시간이 빚은 공간 함께 살아가는 땅 257-260p

어떤 때 보면 정말 철없는 어머니도 있어요. 20대 어머니들 중에는, 누님인지 어머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여자도 있어요. 대학생 같은 옷차림을 한 어머니도 있어요.

그런 애들 같은 어머니가 과연 아이를 잘 길러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듭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대학도 다니지 않고 명작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고 텔레비전을 본 적도 없지만 거의 본능에 가까운 슬기로 남과 싸우지 말아라". "먹는 음식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다".

“밥상에서 그러는 게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발 꼬고 앉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가를 끝없이 가르쳐주셨어요.

그런데 오늘의 젊은 어머니들은 대학 나온 사람이 자기 아이보고

"야, 너 맞고 들어왔어? 가서 너도 실컷 패줘 버려! 병신처럼 밤낮 맞고 다니지 말고" 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니 이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

지금은 서로 상대방을 때리라고 격려하느라 정신없어요. 이런 것을 보면 아이를 기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애나 봐라’ 하고 절대로 ‘나’자를 붙일 수가 없지요.

나 자 나온 김에 또 한마디 하지요. 인생을 바꾸려면 ‘나’자를 '도’자로 바꾸면 됩니다.

어떤 여자대학 졸업생이 "나는 대학까지 나왔는데 밤낮 차나 끓여내라고 하면 도저히 같이 못살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나는 '차나 끓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차도 끓인다고 생각을 하면 마음 편하다.

남편이 늦게 돌아왔을 때에 술이나 밤낮 먹고 다닌다 그러지 말고, 우리 남편이 오늘 술도 먹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도’라고 붙일 곳에 ‘나’를 붙여서 제대로 성공한 사람 본 적이 없어요. 이민 간 사람 중에 한국에서 살기 어려우니 미국에나 가서 살아보자고 한 사람, 거기서도 잘살지 못합니다.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 하자

우리를 지켜주는 집 여권의 신장,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251-252p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싹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맞으면 그 이상으로 복수하라며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이건 칼의 문화를 일으키는 것이 된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는 자신의 주인인 영주의 복수를 하고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무사도는 그런 것이다. (忠臣藏) 칼의 문화는 대립하고 싸우며 피를 흘려야 한다. 복수는 끝이 없다. 누군가는 죽어야 끝난다.

대립과 경쟁을 낳게 하면 안 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아니었던 과거에는 죽고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칼의 힘이 적용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천재적인 창조, 창의력 등이 더 중요해졌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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