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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당신 크리스천 맞아? : 이어령 대화록 2 / 생명이 기록될 때 비로소 사람다운 삶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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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당신, 크리스천 맞아?

| 이어령 대화록 2

지은이 : 이어령 저자(글)

펴낸 곳 : 열림원

펴낸 날 : 2023년 02월 13일

자신이 피조물인데도 작가나 지성인들이 오만한 이유는 자기가 무얼 만드는 줄 알아서입니다. 아마 그림 그리는 사람도 음악을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자기는 무언가 창조할 수 있다는 지적 오만 때문이지요. 지나 온 지적인 삶을 결산하고 시간이 남으면 고해성사 하듯이 거듭난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보는 자연, 인간, 사랑을 소박하게 써나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몇 년 더 글을 쓰는 축복을 주시면 내 생각을 책으로 쓰고 싶어요.

시도 작년부터 썼는데,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를 썼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순간의 이야기죠.

15p 1.나는 피조물이었다. * CBS라디오 <장승철의 CBS 초대석>, 2008년 1월 6일 방송

 

창조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다. 생명 탄생에도 그렇듯, 예술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창작가의 생각과 모든 정력이 투입된다. 생명을 불어넣어 많은 이들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술가들의 일이고 의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의무에 빠져있다보니 우리의 눈에는 건방져보이기도 하고, 시니컬한 이미지가 강하다.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는 아티스트들이 많아서 더 그런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음주운전, 마약, 도박 등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예체능 종사자가 생각보다 많다. 뉴스에 자주 보도되다보니 체감상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건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냄으로 자신이 뭐라도 된 것마냥 자아도취 상태에 머무르다보니 범법행위에 거리낌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죠.

참 좋았더라, 참 좋다. 즐거움, 기쁨, 그것이 생명 창조의 기본입니다. 왜 창조하느냐? 즐겁기 때문입니다. 왜 시를 쓸까요? 즐겁기 때문이지요. 그림을 왜 그릴까요?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도박을 하고 술을 먹어도 즐겁죠. 그러면 그게 진정한 즐거움일까요? 술, 깨고 나면 전혀 즐겁지 않죠. 도박, 잃고 나면 조금도 즐겁지 않아요.

창조 속에서만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기쁨이 없는 생산, 즐거움이 없는 생산을 주어진 삶 속에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참된 창조란 굶어가면서도 기쁨에 겨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모티프가 오늘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

저는 독선적인 기독교인을 싫어했을 뿐입니다. 멀쩡한 사람보고 악마라고 손가락질하고, 나는 믿는데 너는 안 믿는 사람이라고 단죄해버리거든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크리스천인데 말이죠. 얼마나 독선적인 시각입니까. '독' 자와 어울려 아름다운 것은 독창성뿐입니다. (웃음)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창조적으로 바꾸면, 창조적인 남편, 창조적인 아들이 되면, 매일매일 새로운 해가 뜰 것입니다.

30p 1.나는 피조물이었다.

* CBS라디오 <장승철의 CBS 초대석>, 2008년 1월 6일 방송

 

만드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건 내가 직접 무언가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원데이 클래스로 취미를 배워보는 사람들은 그 이유에서다. 가죽공예로 조그마한 지갑을 만들어보거나, 뜨개질로 장갑을 만들거나. 나의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변환되어 나타나니 신기하고 즐겁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이런 곳에 사용하지 못한다.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내 에너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환되어 나타나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주말이 되면, 더욱 그렇다. 다른 곳에 쓸 수가 없다. 평일을 위해 아껴야만 한다.

어느 날에는 배가 고파 식기도를 안 하고 숟가락을 먼저 들었더니, 집사람이 “여보, 당신 또 식기도 안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럴 때는 제가 "아이쿠, 내가 잊었어. 미안" 하고 솔직히 말을 해야 하는데, "아냐, 식기도는 다 먹고 난 다음 감사드리는 게 진짜야. 먹어보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외치는 거, 그거 다 위선이야" 이랬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이 저와 50년 넘게 살았는데 절 모르겠습니까. "그 변명하고 둘러대고, 그런 지적인 조작! 머리 굴리는 거! 그거 여전히 못 버렸군. 그거 하나님이 다 아셔요" 하더군요.

제가 그런 거짓말을 할 때는 표정이나 목소리부터 달라 지거든요.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니 거짓말탐지기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시기 전에 이미 나 자신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영성이고 심성이면서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밖에 있지 않습니다. 믿으면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전 뼈저리게 느낍니다.

49p 2.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명성교회 간증, 2008년 12월 14일

 

이 대목은 그의 다른 저서 “먹다, 듣다, 걷다”에서도 등장한다. 회피하는 일조차 그는 지적인 이야기를 사용합니다. 평생을 지적 호기심에 사로잡혀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영성에 있어 그래서는 안 되지만, 아직 그는 다다르지 못한 “문지방”위에 서있습니다.

저는 습관이 안 되어 식사 기도를 잘 잊어버립니다. 거의 70년 동안 기독교와 관계없이 살았으니 잘 안 됩니다. 식전 기도를 깜빡해 지금도 곧잘 기도 없이 먹어요.

그러면 집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가 꼭 한마디 합니다. 당신 그리스도인 맞아요? 저는 지기 싫어 식전 기도는 잘못된 것 이라고 대꾸합니다.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기도를 하냐고, 다 먹고 맛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답해요. 그래서 식전 기도가 아니라 식후 기도를 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 인간적인 생각이지요.

먹다 듣다 걷다/두란노/ 28p 제1부 먹다. 먹기 위한 기도 中..

 

다른 저서에서는 식전기도를 깜빡 잊어버리고 난 뒤 말했던 자신의 표현에 대해 인간적인 생각이라며 수정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괴롭거나 기쁜 건 신의 뜻이 아닌 내가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은 그것을 규정하지 않았다며 말이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과 의심이 참 많고 질문을 잘 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이 노아의 방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이 세상 모든 생명을 홍수로 정죄하셨고, 오직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생명만이 구함을 받았다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의심 많던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모든 생명을 멸하시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생명만 살려주셨다고 했는데, 그럼 물고기는 어떻게 됐대요? 물고기는 노아의 방주로 들어가지 않아도 안 죽지 않습니까, 물에서 사는데......” 그러자 목사님이 매우 화를 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말씀을 막 하시는 겁니다. 전 그동안 이런 짓만 하고 다녔습니다.

50p 2.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지적 호기심과 의심 그리고 준비된 믿음

* 명성교회 간증, 2008년 12월 14일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목사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본인과 다르면 배척하며 포용하지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종교를 설파할 수 있는가요. 예수는 그러지 않았죠. 믿지 않았던 토마에게도 자신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며 믿음을 주려 노력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 20: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 20:29

 

도마는 오늘날의 시대로 볼 때, 증거주의 원칙을 따랐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건 믿는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증거의 효력을 갖기 때문이죠.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목사는 어린 이어령의 궁금증을 믿음으로 변환시키는 일을 했어야만 합니다.

신분세탁을 목적으로 조직 폭력에 몸을 담고 있던 자가 목사가 되었던 옛 시절을 생각해보면, 이어령 선생은 능력 부족한 목사를 만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이나 제대로 읽어봤을까 싶은 그런 작자를 말이죠. 이런 자들은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종교를 정치화시키고 세속화 시키는 인간들 말입니다.

종교는 지난날 우리 역사에서 파괴를 담당했습니다. 몇몇 이들의 인간적 욕심에서 출발한 결과 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등장은 가톨릭의 부패였고, 십자군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종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특히 종사자의 노력이 가장 중요해요. 전달자의 의도가 강력히 작용하게 설계되어 있는 구조 때문에 자칫하면 선동이 됩니다. 뭐라도 된 것마냥 함부로 조언하며 예수와 하나님을 들먹이면 안 되겠죠. 그런 멍청한 곳에 있다면 빠져나와야 합니다. 곡해되기 쉽고 나조차 그렇게 변할 수 있어요.

"종교는 지상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셨잖아요. 종교가 땅의 것이면 뭐 하러 기독교를 믿어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지상천국, 혹은 지상에서 자꾸 뭘 하려고 해요. 복지니 사회봉사니.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너무 세속화돼 있어요. 내가 원하는 종교는 그게 아닙니다. 본 회퍼(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암살을 꾀하다 처형된 독일 신학자)니 해방신학이니,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건 나와 맞지 않아요. 그런 건 굳이 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아도 되지요. 사회적 윤리와 도덕으로 하면 되는 거예요. 같은 맥락에서 문학도 정치화되면 안 된다는 거죠.“

117p 3.나 아닌 사람을 진정 사랑한 적이 있던가

한국교회의 세속화

* 동아일보, 「신동아」 2011년 2월호, 126~141쪽

 

인간사에서 선행이라 불리는 기부와 봉사활동은 인간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종교단체를 낄 이유가 없습니다. 왜 종교라는 플랫폼으로 기부활동을 펼쳐야만 할까요? 우리는 21세기를 살기 때문일까요? 카카오톡으로 이야기하듯,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공유하듯, 가상의 플랫폼을 통해 세상과 연결하고 있어서라면 종교는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라는 공간의 구조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말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의도에 맞춰 교회는 움직여야 합니다. 헌금과 십일조는 그 움직임에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오프라인에서 인간은 타인과 연결감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때 나오는 호르몬은 영성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로 강합니다.

내가 생명이 자본이라고 하니까, 보는 사람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자본이 뭔데? 생명이랑 자본이 어울리는 말 이야?'라고 물어요. 순우리말로 하면, 자본은 '밑천'입니다. '장사 밑천'이라고 하잖아요. "내가 장사의 자본이 좀 딸려" 이러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데, " 장사 밑천이 좀 딸린다" 하면 단번에 알아듣습니다.

장사하는 데 밑천이 '돈'이라면, 사는 데 밑천은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손자예요. 이게 생명의 밑천이죠. 어렸을 때 보면, 아버지들 치켜세우는 말이 "자식 농사 잘 지었네" 예요. 농사짓는다고 표현하잖아요. 그게 자본이 아니고 뭐예요?

생명을 만들고 그것을 밑천 삼는 것을 '생식' 이라 하고 죽은 물건을 가지고 무언가 만드는 것을 '생산’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농사지을 때만 하더라도 전부 생식이었어요. 씨 뿌리죠, 자라나죠. 오늘날 자본주의는 전부 생산입니다. 공장에 가면 죽은 것들뿐이죠. 가령, 양 목장에 가보면 양들이 살아서 매에 하고 돌아다니는데, 직조공장에 가보면 죽은 양털로 실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옷감을 짭니다.

오늘날의 경제는 죽어야 자본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나무를 잔뜩 심었다고 해봅시다. 어떻게 해야 자본 이 될까요? 나무를 베서 집 짓는 목재로 만들어 팔아야 비로소 자본이 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자본이 되지 못하죠.

그런데 남이섬을 보세요. 잘 자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쫙 펼쳐져 있죠. 한류 붐 타고 일본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모릅니다. 그 나무들을 잘라서 목재로 만든다면 그만큼 벌 수 있을까요?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말은 나무도 이렇게 살려놓아야 자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와 꽃을 아름답게 가꿔놓으면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영화도 찍으러 오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반드시 죽여서 목재로 만들어야 자산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슬픔입니다.

139-141p 4.생명은 사랑이다.

* CTS, 삶이 변하는 시간 25분), 91회~94회 방송

 

“생명 자본주의”는 그가 영면에 들기 전까지 계속 제창했던 말이었습니다. 생명력을 가진 것들이 경제를 바꿔야 한다고 말이죠. 신혼집에 금붕어를 키우게 되었고 추운 겨울날 보일러가 꺼졌습니다. 돌아오니 금붕어가 얼어있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부랴부랴 주전자에 물을 끓였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습니다. 금붕어는 다행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화를 그의 저서인 생명 자본주의 초반에 이야기 합니다. 생명 자본주의가 뭔지는 몰랐지만, 그때 어렴풋이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된 듯 하다며 말입니다.

죽어야만 돈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붕어는 죽어야만 돈으로 환원되죠. 붕어찜이 되거나 붕어즙의 형태로 인간이 소비합니다. 하지만, 금이 붙은 붕어는 살아서 소비됩니다. 인간의 만족으로 소비되죠. 금붕어를 키우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 생명을 유지하며 인간에게 다른 차원의 감각을 전달합니다. 이어령 선생이 겪었던 금붕어 이야기 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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