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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난중일기 | 군인정신, 직업정신이 강했던 또 효심이 가득한 애틋했던 조선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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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난중일기

지은이 : 이순신

옮긴이 : 장윤철

출판사 : 스타북스

출판일 : 2022-07-27

칼의 노래를 읽고 난중일기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읽게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으나, 이런 마음조차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하찮은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대혼란의 시기를 그의 일기로나마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다.

계사년 6월 11일

아침에 왜적 토벌에 관한 공문을 작성하여 영남 수사(원균)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능함의 아이콘인 원균. 일기 속 그를 표현하는 단어는 “만취”, “도망”이다. 원균이란 인물에게 우리는 비난만 쏟기에는 다소 위험하다. 지난 200년 간 전쟁은 없었다. 평화 속에 안주하며 살았던 습관이 몸에 깊게 베여 군인정신을 잊고 지냈던 것에 대해 나라고 과연 달랐을까 라고 되물어보면 쉽게 답할 수 없다.

직업정신, 사명감이 강했던 그에게 원균은 답답함이었을 거다. 어쩌면 나도 이순신 장군에게는 그런 존재가 되었을 지 모른다.

계사년 7월 초9일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한 점 티끌도 일지 않고, 물과 하늘이 한 빛이요, 서늘한 바람이 언뜻 불어오는데, 홀로 뱃전에 앉았노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새벽 1시경이 지나서 본영의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소식을 전했는데, 실상은 왜적이 아니고, 영남 피난민이 왜인 차림으로 가장하고 광양으로 돌입하여 여염집에 불을 지르고 소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진주의 일도 헛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주 일만은 그럴 리가 만무했다. 닭이 벌써 울었다.

난중일기가 역사적 사료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당시의 외부 상황도 상세히 기록했다는 점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로 만드는 일이다. 그 혼란 속에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기 어렵다. 최근에 들어서 사진이란 것이 발명되고 종전 기자가 실상을 촬영하지만, 그 옛날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조선시대에는 명확히 확인할 길이 많지 않다.

왜인들과 함께 도망가려던 자를 잡아 처형하는 일 등 시대적 상황도 알 수 있다는 점이 난중일기의 특징이다. 또한 개인적인 마음도 담담히 적어둔 것은 그의 성격과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계사년 7월 21일

맑음. 경상 우수사•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도모했다. 원 수사가 한 말은 매우 흉측했다. 분별없기가 이와 같으니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겠는가. 그의 동생 원연도 나중에 와서 군량을 얻어 가지고 갔다. 저녁에 흥양 현감도 와서 초저녁에 돌아갔다. 밤 8시경에 오수붓기 등이 거제 정찰소로부터 와서 보고하기를, 영등포의 적선이 아직도 머물러 있으면서 멋대로 날뛰고 있다고 했다.

원균의 생각은 도저히 답이 없었던 듯 보였던 것 같다.

계사년 8월 25일

맑음. 꿈에 적의 행적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새벽에 각 도대장에게 통보하여 바깥 바다에 나가 진을 쳤다가 날이 저물어 한산도 앞바다로 돌아왔다.

꿈은 욕망에 대한 재현물이다. 과거의 경험이 내적 불안이란 욕망과 결합해 꿈이라는 산물로 도출된다.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건 이전 육상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공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겪었던 승리에 대한 감정과 안도 등이 그의 군인정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을 거다. 이때마다 마주쳤던 적의 눈과 전장터의 모습은 불안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거다.

불안한 감정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 욕망은 그로 하여금 꿈 속에서까지 마음 편히 있게 만들지 못했다. 꿈속에서조차 헤어진 연인이 나온다거나, 일을 하는 모습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채 지내다보면 그것들이 전부 꿈에 반영된다.

갑오년 정월 11일 경인

흐리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님을 뵙기 위하여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천(여천시)에 닿았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가서 어머님 전에 아뢰었더니, 어머님께서 아직 주무시고 깨닫지 못하셨다. 소리를 크게 하자 놀라 깨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여 몰래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어머님 말씀만은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할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손수약 조수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어머니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애틋한 효심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안부를 주기적으로 전해듣고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십 수 차례 어머니의 안녕을 전해듣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탐후선*이 올 때마다 부하에게 소식을 듣거나 종에게 어머니의 건강상태를 전해 듣는다.

연세가 노후하신 어머니였으나 아들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전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들을 토벌하는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며. 어머니가 오래 산다는 건 행복이다. 전쟁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탐후선 : 정찰 또는 보급에 사용하던 배

갑오년 4월 초9일

맑음. 아침에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붙였다. 큰비가 내렸다.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스러움을 어찌 말하랴.

능력있는 장수가 죽었다는 소식에 크게 통탄한 이순신 장군. 자기 일에 능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아꼈다. 일기에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건 어영담 장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공을 세운 뒤 얼마 있다 병으로 죽으니 더욱 애통했을 것이다. 바다길을 읽는 지략가로 한산대첩를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갑오년 5월 초6일 계미

흐리다가 늦게 갬. 사도 첨사• 보성 군수• 나안 군수. 여도 만호• 소근포 첨사 등이 찾아왔다. 오후에 원 수사가 사로잡은 왜인 3명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문초를 했더니 이랬다 저랬다 수없이 속였다. 즉시 원 수사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하게 했다. 우수사도 왔다. 술 세 순배를 마신 다음 상을 물리고 돌아갔다.

혼란을 틈타 혼란을 가중시키는 이들이 있다. 왜인들의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을 베고 끝냈다.

병신년 윤 8월 12일 병자

맑음. 종일 노젓기를 재촉하여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더니 백발이 아주 무성하셨고, 나를 보시더니 놀라 일어나셨다. 기운이 흐려지셔서 아침 저녁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도록 위로하고 기뻐하시도록 어머님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병신년 윤8월 13일 정축

맑음. 아침 식사를 할 때 곁에 모시고 앉아서 진지를 드시게 했더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본영에 돌아왔다. 오후 6시경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노젓기를 재촉했다.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란 중임에도 찾아뵙는 효를 다했다.

정유년 6월 17일 병자

흐리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어 밤빛이 쓸쓸하다. 새벽에 일어나 앉았으니 비통함과 그리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랴. 아침 식사 후에 원수에게 갔더니 원공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많이 말했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이는 데, 원균의 장계의 내용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격파한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입하려 하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토벌할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고, 원수의 장계의 내용에는 통제사 원균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오직 안골포를 먼저 토벌해야 한다고 혼란을 자아내도록 운위하고 있어서 수군 여러 장수들이 딴 마음을 품는 경우가 많이 있고,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므로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함께 합의하지 못할 것이니 일을 망쳐 버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수에게 고하여 이희남 및 변존서• 윤선각에게 모두 공문을 보내어 독촉해 오도록 했다. 올 때 황 종사관 사처에 들어가 앉아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묵고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이희남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는데 초계 군수에게 보였다니 양식 없는 일이라 하겠다.

정유재란 때부터 원균의 활약상이 드러난다. 부하의 신임을 잃은 장군에게 무엇이 남았겠는가. 나라 안팎으로 혼란이 계속되는데 장군이란 자가 하는 일이라곤 소득없는 일만 벌이니 말이다.

정유년 7월 18일 정미

맑음.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간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및 여러 장수 등 다수가 해를 입어 수군이 대패했다고 하니 들려 오는 것마다 통곡이 나오는 것을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원수가 이르러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리오 하면서 오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보고 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고했더니 원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나는 송대립 • 유황 • 윤선각 • 방응원 • 현응진 •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홍우공과 더불어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렀더니 삼가 현감이 새로 도임하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도 와서 오래 이야기했다.

정유년 7월 21일 경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곤양군에 이르렀더니 곤양 군수 이천추가 고을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쓰고 있다가 혹자는 올벼를 추수하기도 하고 혹자는 보리밭을 갈기도 했다. 낮에 점심을 먹은 후 노량(하동군 금양면)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의 명의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호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서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거늘, 인하여 패하게 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는 먼저 달아나 뭍으로 올라가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본받아 뭍으로 달아나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대장의 과오를 말하는 것은 입에 담아 형언할 수 없고, 그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고 했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더불이 이야기하다가 새벽 2시경에 이르도록 조금도 눈을 분이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결국 장군이란 자가 먼저 도망가는 악수를 보였다. 원균은 정쟁에 능했을 지 모르겠으나 전쟁은 아니었다. 역사 속 그는 치욕스러운 인물로 남았다.

읽으면서 많은 부분 반성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능력있는 자가 되었는지. 효를 다한 사람이었는지를. 전쟁이란 대혼란 속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기록했는지. 부족한 마음을 앞으로 채워야겠다는 자기성찰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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