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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니체의 신은 죽었다. : 방황하고 아파하는 젊은 지성의 아포리즘 | 실존주의 철학의 기반이 된 니체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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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

: 방황하고 아파하는 젊은 지성의 아포리즘

저자 : F. W. 니체 , M. 하이데거

번역 : 강윤철

출판사 : 스마트북

출판일 : 2015년 01월 02일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준 니체. ‘신은 죽었다’는 말은 철학에 관심없는 이라도 한번쯤 들어본 문구다. 그는 종교적 관념인 신의 개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존재가 무너졌다고 보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관념인 신에 대한 존재는 종교의 부패로 인해 몰락된 것으로 생각했다.

니체는 ‘초인’의 개념을 언급했고 인간이 발견해야 할 무언가로 설명했다.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의욕된 인간의 본질을 갖춘 인간을 초인이라고 부르는데 무엇인가 지배하려고 하는 마음가짐 앞에 발견되는 것으로 보았다.

의지는 자기의 의지를 바라고, 자기 자신을 바란다. 여기서 자신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초인의 개념은 의지, 의욕에서 출발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초인의 개념은 랄프 왈도 에머슨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저서 ‘자기신뢰’를 읽어보면 초월주의의 개념과 니체가 말하고자 한 초인이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자기를 집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의지는 바라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했는데 의욕하는 마음이 있어 스스로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 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지배하려는 마음으로 이해하면 개념이 얼핏 그려질 것이다. 인간이 갖는 의지는 지배자가 되려는 의욕으로 보면 된다. 노예가 노예로써 존재하는 것은 지배자가 되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보았다. 노예로 있는 것은 자신이 노예로 있고 싶은 지배적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노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그 지배적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밑으로 명령할 수 있는 이를 가지려 했을 것이다. 이 또한 ‘권력에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의지를 무엇을 바라거나 단순히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의욕하는 것’은 본래 ‘명령하는 것’으로 보았다. 노예가 노예로써 머무르는 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그런 명령을 자신에게 내렸고 노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것으로 이해했다. 하인이 누군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려고 하는 행위 역시 스스로가 그렇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비판했다. 염세주의 철학을 이야기한 그를 ‘심리학적 위조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허무주의를 근거로 삼은 다음 삶의 가치를 낮추기 위하여 삶에의 의지를 높었던 악의에 찬 천재가 바로 그이다.

쇼펜하우어를 향한 니체의 평가

그의 능력을 칭찬하는 듯하지만 비난하는 표현이 많다. 허무주의로 시작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예술도 천재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인간은 고뇌와 외로움을 가진 희극배우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시작점은 ‘부정’이다. 인간 조차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우둔한 사람은 사교, 오락, 연극 등 끊임없는 자극 속에서도 죽고 싶을 만큼 지루한 권태를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점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공감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스탠스를 우둔한 사람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재주와 지혜가 풍부한 인간은 혼자가 되어도 자신의 사상과 생각에서 위로를 받을 거”라고 말했는데 회의적이다.

니체는 초인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해 반발심이 들었을 지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우둔한 사람은 향락을 추구하기 위해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갈망한다고 보았는데 이점은 초인주의와 조금은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아갈 때 의지와 의욕이 실현되고 ‘초월하는 나’를 마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그런 점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태생부터 정해진 인간의 기질과 성향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인간만이 웃는가를 나는 가장 잘 알고 있다.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하고 있다.

재밌는 건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받아서일까 니체 자신도 그의 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했다. 자신의 뿌리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너는 너의 친구에게 순수한 공기이고 고독이며 빵이고 약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쇠사슬은 풀지 못하지만, 친구에게는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멍청한 사람은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 쇼펜하우어. 지적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추구하는 향락의 방향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먹는 것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이, 운동과 같은 외적인 활동에서 자극을 느끼는 사람, 책을 읽고 사색하며 정신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자신은 스스로가 바꿀 수 없을지 몰라도 친구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동정은 최고의 모욕이다.

신이 죽은 이유는 “사람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그렇게 말했다. 연민의 정이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동정, 연민은 내 마음 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상대는 고려하지 않고 내 멋대로 만들어낸 감정이다. 연민과 동정을 얻고자 하는 이는 없다. 그런 마음은 오로지 자신보다 하등한 인물을 보고서 느끼는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본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로서만 측정될 수 있다.

장 폴 샤르트르는 나에 관해 진리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타인을 거쳐야한다고 보았는데, 아마 니체의 이런 점에서 영감과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국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를 증명하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나의 생각, 사고, 가치관 등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다. 옳은 신념, 좋은 사고를 갖고 있다고 해도 나 혼자만 알고 있다면 소용이 없다. 알아줄 사람 없는 무인도에 있다면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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