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총서 47
지은이 : 신범식, 윤민우, 김규남, 최경준, 박정후, 강봉구, 이지은, 정세진
펴낸 곳 : 사회평론아카데미
펴낸 날 : 2022년 7월

아제르바이잔의 국내적 수준의 요인들과 외교정책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정체성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가지는 터키와의 연대의식과 반러시아 정서는 아제르바이잔이 친터키,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진하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 반러시아 정서는 반 러시아 외교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국내적 수준의 요인들과 대외적 요인들의 제약 또는 조건적 영향 때문이다.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인구구성에서 아제르바이잔인이 약 91%를 차지해 상당히 높은 정도의 민족적 단일성을 보인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러한 단일성의 정도가 낮은 편이고 특히 아르메니아인(1.5%)과, 러시아인(1.8%), 레즈기스(2.2%)와 탈리시 (1.0%) 등 소수민족이 일정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국내정치적 불안요인이 된다. 이들 소수민족들은 나고르노 카라바흐, 레즈기스, 탈리시 등 특정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어 분리주의 주장에 따른 국내 정치적 위험이 된다. 또한 아제르바이잔 내 러시아인의 존재는 국경을 맞댄 강대국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정체성 형성에 투르크적 요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Erol 2013, 46) 아제르바이잔은 이웃한 터키와 언어, 민족, 및 종교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가진다. 이는 두 나라의 관계를 결속시키는 요인으로 착용한다(김대성 2011. 5). 이와 같은 두 나라 간의 언어적, 민족적, 종교적 공통점에 근거한 연대의식은 1990년대 초반 아제르바이잔 독립 직후 출범한 엘치베이(Elchibey) 정권이 터키주의를 강조하면서 아제르바이잔과 터키 간에 연방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포함한 친터키 외교정책으로 구현되었다(김대성 2011.9).
반면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정체성 형성에 러시아는 중요한 반대와 저항의 타자(other)로서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제정러시아의 아제르바이잔 칸국들의 점령과 지배는 저항적인 아제르 민족주의를 낳았다. 아제르 민족주의는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반러시아 감정은 소설과 시 등에서 강조되었다. 그러한 문화적 민족주의는 아제르 무슬림들에 대한 러시아의 차별과 억압 그리고 강요된 러시아화(Russification)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반러시아 감정은 과거에 자신들의 역사적인 아제르 무슬림 칸국들에 대한 자부심과 영광과 결합되어 문화 정치적 민족주의로 통합되고 이는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Erol 2013, 47).
제2장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정치와 중간국 외교 78-79p
국내 체류 중국인이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반중정서가 위험하다. 부동산을 점거한 외국인 중 상당수가 중국인이다. 자국에서 대출받아 구매하니, 우리나라는 그걸 증빙확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부동산이 거래된다. 외국인 거래가 있으면 부동산도 활기를 띌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리스크도 안아야 한다. 미국을 보면 우린 알 수 있다. 일본이 상당부분의 부동산을 취득하지 않았는가. 금싸라기 땅에 일본 소유 부동산이 많다.
어찌됐건 단일 민족적 특성을 가진 한국에서,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어 반중정책, 반중정서를 일으키기 쉽지 않다. 아제르바이젠도 마찬가지다.
아제르바이잔이 미국-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추진 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주요한 동력은 아제르바이잔이 보유한 에너지 자원과 러시아를 우회하여 중앙아시아 캅카스 유럽을 이을 수 있는 운송 교통의 요충지라는 역량과 조건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세계 20위 수준의 원유와 세계 25위 수준의 천연가스의 생산 및 경유지로서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에너지 자원과 지리적 중요성은 이 지역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고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서방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려는 미국-서방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예를 들면, 독립 직후 초창기에는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는 미국의 입장 때문에 미국과 아제르바이잔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알리에프(Aliyey) 대통령은 카스피해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으로 미국과 서방 기업들을 유혹하였다.
1994년에 세기의 계약(Contract of the Century)이라고 불리는 BP, Amoco, Statoil, Shell 등 많은 주요한 서방 에너지 기업들과 컨소시 엄을 형성하는 생산공유협정(Production Sharing Agreement, PSA)을 체결하였다(Erol 2013, 93), 또한 카스피해 원유와 천연가스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유럽으로 공급하는 BTC(Baku-Tbilisi-Ceyhan)라인과 BTB(Bakur-Tilisitraurum)을 건설하여 미국과 서방의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전략적 관심을 높였다(Aliyev 2009).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에너지 자원과 지리적 가치는 아제르바이잔의 대미-대EU 외교정책의 주요한 지렛대 역할을 하며 미국-서방이 남캅카스에 전략적 관심을 갖고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아제르바이잔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은 미국 서방이 아제르바이잔 정권의 권위주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전략적으로 지원하도록 이끈다 (Cheterian 2010).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이와 같은 에너지 자원을 이용한 친미-친 서방 외교정책이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아제르바이잔은 1994년 서방 석유기업들과의 '세기의 계약'에서도 러시아에 10%의 지분 참여를 보장하였다.
제2장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정치와 중간국 외교 84-85p
아제르바이잔은 민족적 통일성이 높은 축에 속하나 일부 다른 민족으로 인해 불안한 요소가 있다. 앞선 인용구에서 볼 수 있듯. 물론 모든 국가가 어느 노선을 확실히 정할 수 없다. 미국 빼고. 주변 지역의 영향을 무시 못하는 게 외교이다. 우리나라만 중국과 일본, 북한, 미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제르바이젠은 에너지라는 카드를 잘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을 상대로 무엇을 유지해야 하는가. 앞선 기술력이다. 반도체, AI, 전기차, 배터리, 통신 기술 등 기술이 중요하다.
낸드 메모리, D램은 여전히 우리가 공급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삼성의 DDR5의 수율 문제와 자체 AP 생산 품질 문제 등 위기에 봉착해있다. 전기차 역시 미국의 규제로 인해 수출의 길이 좁아지고 있으며, 배터리 역시 전고체 배터리 등 여러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 개발에 속도가 붙고있지 않고 있다. 5G는 여전히 잘 안 터지는 곳이 있다. 외교에 있어 확실한 카드는 군사력과 경제력(기술)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두 나라 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다. 1988-1994년 이후로 지난 30년간 나고르노-토카라바흐 문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두 나라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상수로 작동해왔다. 지난 2020년 7-9월에도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두 나라는 다시 분쟁을 벌인 바 있다. 소련 시기에 이 지역은 인구 구성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속하여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소련이 해체되고 신생 독립국가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출범하는 시기인 1988년에서 1994년 사이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전쟁을 아르차흐 해방 전쟁'으로 부르며 정당한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되찾는 영토회복 노력으로 이해한다. 실제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아르메니아는 대승을 거두었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중앙정부의 통치에서 벗어나 사실상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 전쟁을 정당한 주권국가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탈하고 해당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모두 내쫓은 아르메니아의 침략행위로 이해한다. 이 전쟁은 이후 30년 동안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최근 재발된 두 나라 사이의 군사적 분쟁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싸고 그간 잠복되어 있던 갈등이 다시 발현된 것이다. 최근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으로 끝난 것으로 평가 되었다. 러시아의 중재로 종료된 이번 분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1988-1994년 전쟁에서 빼앗겼던 지역 가운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수도인 스테파나케르트를 제외한 주요 지역 대부분을 되찾았다 (김소연• 신기섭 2020; 임명 2020: Erol 2013, 56). 오늘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갈등의 가장 직접적인 기원은 이 지역을 오랫동안 통치한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관리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제정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인의 이주를 오스만투르크 등의 남쪽의 이슬람 제국들의 세력 확장을 차단하고자 하는 억제정책의 일환으로 이용하였다. 제정러시아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과 다른 남캅카스 지역에 이주시킴으로서 터키계 무슬림들인 아제르인들을 통한 오스만투르크의 세력 확장을 차단하기 위한 전략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1826-1828년 5차 러시아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투르크멘차이(Turkmenchai) 조약 이전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소수였다. 예를 들면, 1823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체 인구의 9%만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 나머지 91%는 무슬림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이후 제정러시아 당국이 주도한 이 지역에 대한 아르메니아인의 이주정책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인구구성은 상당히 변화된다. 1832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인은 인구의 35%를 차지했고 이후 1880년에는 53%를 구성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다수인구가 되었다(Erol 2013, 49-50).
제2장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정치와 중간국 외교
I.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과 주요 요인들:
대외적 수준의 요인들과 외교정책
1)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88-89p
아프리카 내전의 문제도 프랑스와 영국의 제멋대로 그어놓은 국경획정 때문이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이 문제는 행정구역과 거주인구의 불일치로 발생했다. 국토를 내어줄 수도 없는 문제이며,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로 이주시키는 것도 도의적 문제가 발생한다. 어찌됐건 행정구역 상 자국에서 거주하는 국민이기에 다른 나라로 넘기는 건 국민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소련 해체 이후 발생된 분쟁은 최근 종결된 듯 보이나, 다시 발발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그나마 미국과 중국의 주도 하에 38선을 그어놨기 때문에 영토에 대한 분쟁은 없다. (물론 북한이 우리 땅을 불법점거하고 있는 것이지만, 반박할 시 헌법에 나와있으니 참고바람 )
지역 강국으로서 터키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대외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터키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갈등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아르메니아에 적대적이다. 터키는 아르메니아와 ① 1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인정과 보상. ② 국경 획정, ③ 터키의 아르메니아 국경 봉쇄, 그리고 ④ 터키의 캅카스 지역에서의 범터키 정책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경계 등의 문제들과 관련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터키는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1915년 대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학살에 대한 인정이 터키-아르메니아 사이의 국경 획정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현재의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획정한 1921년 소련-터키 간의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터키 북동부 지역과 카스지역(Kars Region)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터키는 학살을 인정하게 되면 이와 같은 아르메니아의 영토 요구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한다(김연규 2009, 170-171). 터키는 또한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어 아르메니아의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인근 지역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아르메니아에 대한 국경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국경 봉쇄를 통해 아르메니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하여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 내 점령지역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의도한 것이었다(김연규 2009, 171). 이 밖에도 터키는 소련 해체 이후 적극적으로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지역에서 범터키주의에 기초한 문화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장하는 외교정책을 추진 하였는데 특히 캅카스 지역에서 이러한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터키와 역사, 인종, 문화, 언어적으로 밀접이 연결된 아제르바이잔은 가장 핵심적인 국가에 해당했다. 이와 같은 터키의 영향력 확장에 대해 아르메니아는 상당한 경계심을 드러낸다. 아르메니아는 터키가 범터키 연대를 내세워 캅카스와 그 주변지역에서 세력 확장을 하는 과정은 그 중간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에 대한 말살 정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염려한다. 이에 대항해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이란 등과 연대하여 반터키-반아제르바이잔 전선을 형성하는 외교정책을 추진한다(김연규 2009, 172-173).
반면 터키는 범터키 민족주의에 따라 아제르바이잔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터키의 캅카스에 대한 세력 확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중요한 전략적 거점국가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갈등에서 아제르바이잔 측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터키는 독립 직후 1991년 11월 9일 가장 먼저 아제르바이잔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다른 어느 국가들에 비해서 먼저 아제르바이잔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터키-아제르바이잔 관계는 군사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1996년에 터키는 아제르바이잔 장교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아제르바이잔의 NATO 프로그램 참여를 적극 도왔다(김연규 2009, 174).
제2장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정치와 중간국 외교
I.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과 주요 요인들:
대외적 수준의 요인들과 외교정책
2) 지역 강국들 : 터키와 이란 94-95p
이란과는 인종, 종교적 유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대적 관계이다. 대만과 중국, 우리와 북한 사이도 그렇다. 같은 언어를 쓰지만 이념의 문제로 차이가 발생한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은 ① 국내적 수준의 요인들과 ② 지역 수준의 요인들, 그리고 ③ 세계적 수준의 요인들이 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이와 같은 결과로 인해 아르메니아는 상대적으로 더 러시아에 의존적인 러시아 편승 또는 친러시아 외교정책을 선택했다. 반면에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 미국-서방, 그리고 터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균형 잡힌 외교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르메니아의 대내외적 요인들은 통합적으로 아르메니아가 친러시아적(또는 러시아에 편승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다. 우선 아르메니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로 인한 아제르바이잔과의 적대적 관계는 아르메니아 외교정책에 있어서 상수로 작용했다.
아르메니아의 국민정체성과 아제르바이잔의 대아르메니아 적대정책은 아르메니아의 이와 같은 대아제르바이잔 적대정책을 결정지었다.
다음으로 아르메니아의 국민정체성은 아르메니아가 서방으로의 편입이라는 친서방적 외교정책을 지향하도록 하는 강한 동력이 되었다. 국가리더십이 주도한 국가전략/의지는 코차리안 정권의 경우처럼 이와 같은 국민정체성의 친서방 열망을 친서방 외교정책으로 구체화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가 가지는 해외 디아스포라와 같은 소프트 파워는 이러한 친서방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제한적인 국가능력/역량과 강한 러시아의 영향력과 미국서방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제한적인 관심과 역량은 아르메니아가 친서방 외교정책을 추진하는 데 주요한 걸림돌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가 가지는 군사안보적 조건과 역량의 한계, 경제/에너지의 조건과 역량의 한계 등으로 인해 미국-서방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관심을 제고할 수가 없었다. 한편 아르메니아 국가리더십은 경제적, 외교적 필요에 의해 터키와의 화해와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국가전략/의지를 선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친터키 정책은 터키에 대한 강한 반감과 적대감을 갖고 있는 국민정체성과 러시아의 영향력에 의해 좌초되었다.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시아 외교정책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는 여러 국내적 요인들과 지역 수준의 요인들,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요인들이 통합적으로 작용하여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아르메니아의 친러시아적인 국민정체성과 아제르바이잔-터키와의 적대적 대치,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약한 국가능력/역량은 강대국 러시아에 편승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강대국 미국-서방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무관심과 지역 강국으로서의 이란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의 한계로 인해,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러시아 이외에는 아르메니아를 후원할 의지와 역량을 갖춘 다른 강대국 선택지가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국민정체성은 러시아보다는 미국-서방에 대한 편승을 더 선호하였지만 아르메니아는 다른 대내외적 요인들의 영향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편승이라는 차선을 선택하였다.
제2장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정치와 중간국 외교
V. 맺음말: 종합분석 및 함의점 105-106p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할 때마다 친일파라며 매도하는 것과 같다. 터키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득 볼 것이 많지 않은 친 러시아적 외교 행보를 선택해야만 했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 잘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이 대동아 논리를 내세우며 강점의 이유를 합리화 시키지 않았는가. 동북아시아라는 큰 담론을 통해 미국을 다시금 견제할 수 있는 키를 쥐어야 한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건 한중일의 협력 기구의 등장이다. 이 시나리오가 완성될 경우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려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물론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북한이 껴있고, 한국과 일본의 반중 정서도 한몫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외교노선을 설명하기 위해선 지정학적 각축이라는 외부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내부동학을 살펴봐야 하며, 역사 속에서 형성된 동서 지방 간 격차는 우크라이나의 중간국 외교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그림 3-3〉에서 보이듯이 우크라이나 동서 지방은 언어, 문화, 역사적 측면에서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하리코프(Kharikov)와 돈바스(Donbass) 등 동부 지역은 17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아 러시아와 역사, 종교, 문화, 경제적 상호의존을 형성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는 광업과 철강 산업, 군수 산업 등이 발전하였으며, 동부의 러시아어 사용자 인구는 90%가 넘는 곳도 있다. 한편 리비우(Liv)를 중심으로 하는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향을 받아 서구적인 역사, 사회, 문화적 전통이 자리 잡았다. 서부 지역은 경제적 측면에서 소련 시기부터 소외되어 독립 이후 지금까지도 산업이 낙후되었으며, 농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동서의 차이는 단순히 지역 간 차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에 기반한 지역주의, 각 지역의 정치적 선호가 지지 정당, 정치 엘리트, 정부의 국내외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인다. 서부의 경우 강력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색채를 띠며, 반러시아, 유럽 지향적인 외교정책을 선호한다. 반면 러시아와 언어, 문화적으로 유사성과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높은 동부 지역의 경우 우크라이나 러시아 이중 국적 허용, 러시아어 공용화, 대러 경제통합 등 러시아 지향적인 모습을 보인다(홍완석 2010).
결국 우크라이나의 동서 지방 간 차이는 역사 • 문화적으로 오랜 기간 고착화되어 온 내부적 균열구도이다. 내부 균열구도는 우크라이나 중간국 외교의 균형적 지향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국내정치의 균열적 구도를 형성하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며, 국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국가건설 과정과 민주화 및 정체성 정치도 함께 고려되어야 했다.
제3장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
III.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상이한 외교노선의 원인과 결과
1. 우크라이나 안과 밖의 결합방식과 균형의 파국
137-139p
독일 통일 이후의 환경과 유사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친러시아, 친서방 그 어느 노선을 택하기엔 무리가 있다. 러시아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매우 밀접하다. 크림반도 합병 때도 우크라이나가 격정적으로 반발하기 어려웠던 건 동부지역의 친러시아 적 성향의 국민들이 있어서였다. 이번 전쟁 이후로 국민들의 정서는 조금 달라졌을 지는 모르겠지만.

2016년 6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6대 경제회랑 구축계획 중 몽중러 경제회랑 건설 계획이 중국, 몽골, 러시아 등 관련국들 간 합의되어 협력 내용을 논의하였다. 16 이에 따라 현재 몽중러 경제회랑 구축을 위한 32건의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교통 인 프라, 산업협력, 국경 통과지점 현대화, 에너지 협력, 무역• 세관• 검사• 검역 협력, 환경 생태 보호 협력, 과학기술• 교육 협력, 인도적 협력, 농업, 의료• 보건 분야로 나뉘어 진행중이며, 교통• 물류 인프라 구 축을 위한 협력사업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업은 몽 골 중국-러시아를 연결하는 3개의 도로회랑과 4개의 철도회랑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 사업을 위해 러시아는 2017년 몽골에 15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결정하여, 회랑 건설을 위한 몽골 내 철도정비 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였고, 2016년 중국은 3억 5천만 위안 지원 및 20억 위안 무상원조를 결정하고 회랑건설을 위한 몽골 내 인프라 정비 및 발전소. 구리제련 시설을 확충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2019년에는 몽골 러시아 투자협력재단 설립에 양국이 합의했다.
16 중국 -파키스탄 경제회랑, 신유라시아 대륙교량, 몽 -중-러 경제회랑, 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 경제회랑, 중국-인도차이나반도경제회랑, 방글라데시-중국-인도-미얀마경제회랑이다. https://news.kotra.or.kr/user/globalAlIBbs/kotranews/list/2/globalBbs-
DataAllView.do?dataldx=158915 (검색일: 2020.12.11).
제6장 몽골의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 경제 • 안보 연계 전략
IV. 다자경제협력 프로젝트 참여 274-275p
중앙철도회랑건설은 유라시아 대륙횡단철도 계획과 연계되어 있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에너지 운송망 건설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는 몽골이 에너지 자력 생산이 불가능 하고, 인구가 적어 군사력, 도로, 철도 등 사회 인프라 구축에도 난항을 겪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어서다. 이러한 자국의 결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의 자본을 이용하는 똑똑한 외교로 실리를 취하고 있다.
고비텍 아시아 슈퍼그리드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이는 몽골 고비사막에 태양광과 풍력방전 신재생 에너지 설치하여 전력을 생산하고, 러시아의 극동지역에서 화력 수력발전소로 생성된 전력을 한국, 몽골,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으로 운송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몽골에 호의적일 필요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우방으로 삼기 위해서 몽골과 가까워져야 한다. 적어도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발생되는 문제를 완충시켜야 하니 말이다.

조지아는 현재 나토 가입보다는 EU 가입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장미혁명 이후로 집권한 사카쉬빌리 대통령이 EU 가입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었다. 사카쉬빌리는 탈러시아, 친EU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의 대통령 집권기에는 이루어지지 않았 지만, 사카쉬빌리 이후 등장한 새로운 정당인 GD가 2014년에 EU와 '협력협정'과 DCFTA' 협정을 체결하면서 EU 가입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EU 가입을 위한 핵심적인 사항은 국내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사카쉬빌리 정권 이후 통치적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가동되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고 있다. 2012년 사업가인 이바니쉬빌리가 GD당을 창설하고 그해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정권 교체가 있었고, 조지아 민주주의는 비교적 순항 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권 교체 자체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정권도 전임 정권처럼 EU 가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GD당의 총재였던 이바니쉬빌리는 친러시아 경향을 가진 인물이지만, GD
당은 전임 정권의 친서방 대외정책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조지아의 EU 가입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불명확하다. '협력협정' 체결 자체가 EU가입을 확실히 확약해주는 보증서가 될 수 없다. 조지아 정부가 선택하고 있는 친서방 대외정책은 지역 강대국인 러시아의 반대에 부닥치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과도 부합 하지 않으며 러시아 대외정책의 방향성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한때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던 조지아의 EU 가입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닥치는 이유도 러시아의 존재 때문이다. 이 사실이 조지아 대외정책의 방 향성의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러시아 조지아 관계는 2008년 전쟁의 분위기가 현재까지 이어지 고 있다. 강력한 반러시아 정책을 추진한 사카쉬빌리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권이 시작되면서 국교 회복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외교관계 복원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조지아는 EU 가입이 라는 분명한 대외정책을 가지고 있고 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EAEU 가입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것이 러시아 조지아 관계의 결정적인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양국 관 계는 현재 2008년 전쟁 전후의 상황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 해체 이후 소련의 공식 계승국인 러시아연방의 정치 담론은 "러시아 국경의 확장'이라는 이념이다. 러시아는 전통적인 주권국의 개념을 가진 국가였다. 러시아는 여전히 소련제국의 기억으로 근린 국가들을 대하고 있다. 소련의 구성 공화국은 대부분 제정러시아 시기 에 러시아 군대가 정복한 민족에 속했다. 조지아도 그렇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 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현실 담론에서 조지아는 과거 옛 소련 공간의 '사활적 이해'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이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조지아의 과거의 정권도, 새로운 정권도 대외정책의 방향성은 친 서방 기조였으며, 특별한 변수가 작동하지 않는 한 이 기조는 오랫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도 정부의 대외정책에 공감하고 있다.
조지아 대외정책의 변수는 서방, 러시아 등 국제정치 행위자들의 국제 관계에 연동받을 것이다. 이는 조지아 대외정책의 불안정성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지아의 EU와 나토 가입은 여전히 불투명하며, 이는 국가 역량의 한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제9장 조지아 대외정책의 방향성
VI. 결론 410-412p
EU, NATO, G20, 전부 일진놀이다. 나름 좀 논다는 애들 모이는 그룹이라 생각하면 된다. UN은 그래도 착하고 나름 끼 있으면 껴주는 느낌이라면, 그밖의 그룹은 경제력, 군사력, 문화력, 뭐 하나 확실한 강점이 있어야 껴준다. 조지아에게 무엇이 있는가. 딱히 없다. 세계 흐름에 맞는 국가 산업을 만든 것도 없고 관광국가로서의 입지도 작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무얼 해야 하는가? 핵심 산업을 튼튼하게 유지해야 한다. 조선업,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잘하고 있는 것을 잘 유지해야 한다. 기후테크에 맞게 철강 산업도 기존 처리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석탄 기반의 용광로에서 철을 만들지 말고 수소를 철광석과 반응시켜 생산하는 직접환원 방식을 포스코는 하루 빨리 도입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