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소설로 떠나는 영성 순례 : 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 문학 강의 / 소설에서 인문학 요소를 찾아보자
이 포스팅을 읽기 전 참고 사항
- 개인적인 후기일 뿐,
독서 전 반드시 참고할 건 아니니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
-책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 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문학 강의
지은이 : 이어령 (지은이)
펴낸 곳 : 포이에마
펴낸 날 : 2014-10-08
드미트리가 동생 알료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지요. "아름다움은 신비로울 뿐 아니라 끔찍하기도 하지. 거기서는 신과 악마가 싸움을 벌이고, 그 싸움터는 바로 인간의 마음이야." 이 말은 아름다움에 대한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시각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흔히 하는 것처럼 편하게 하나님을 만나거나 편하게 작품을 쓰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것을 통해서 미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아주 치열한 투쟁을 했어요. 그래서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쉽게 도달하지 않아요. 도스토옙스키에게 아름다움은 참 신비한 것입니다. 기쁨이고 환희죠. 아름다움처림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동시에 아주 끔찍한 것입니다.
신과 악마가 싸우는 현장이에요. 그리고 신과 악마가 싸우는 그 현장에 내가 있는 것이지요. 참으로 아름답고 끔찍한 모순의 덩어리가 우리가 구하는 예술,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1.카라마조프 형제들 24p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관념을 자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죠. 아름다움은 혼자일 때, 소수일 때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름다울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걸 인식할 수 없어야 해요. 키가 크고 작음은 차이라는 상대적인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죠. 어둠, 슬픔도 포함한 복합적인 것이 세상이죠. 추함도 존재하기에 아름다움도 인식할 수 있고, 아름다움 때문에 추함도 인식할 수 있는 겁니다.
미(美)는 선과 악이 아니에요. 그냥 미로써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반은 유럽적 지성의 소유자로서, 총명하고 천재적인 이성을 대표합니다. 드미트리가 미소를 나타낸다면, 알료샤는 선형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장로 조시마 밑에서 모든 것을 끌어안고 아파하면서 사랑으로 융합시키려 하는 착실한 견습 수도사이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재미없지만, 대입 수능시험에 나오는 식으로, 이반과 알료샤와 드미트리는 각각 진선미를 뜻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보여주는 러시아는 진선미가 아니라 의식주가 가치로 여겨지는 세계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등 따습고 배부르면 괜찮다는 하나의 사고가 흐르고 있지요. 러시아 대중의 세계는 포도르 카라마조프처럼 먹고 자고 입는 것. 그리고 정욕만 충족하면 되는 세계였습니다. 높이도 없고, 타락도 없는 세계.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서 러시아의 다음 세대가 붙들고 가야 할 가치를 모색한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와 쾌락만을 좆을 뿐 어떤 성실성과 덕, 양심도 없는 썩은 러시아와 단절하지 않으면,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가 꿈꾸는 미래의 러시아는 없다는 것입니다.
1.카라마조프 형제들 40p
인간 실격에서 요바 요조는 미를 좇는 인물입니다. 옳고 그름 따위는 없어요.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되며 비로소 인간 실격임을 독백하며 마무리하죠. 무엇이 진이고 선인지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가족들에게조차 자신의 외모를 추한 것으로 냉정하게 평가당하는 그에게 무엇이 남아있겠는가요. 그저 창녀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그거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빵 준다는데 교회 안 올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때 빵이라는 것은 돈이고, 세속적 욕망을 다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제 대심문관이 하는 말이 클라이맥스입니다. 당신이 그때 내 권능으로 이 돌덩이로 빵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더라면, 우리의 고민은 끝났을 것이다. 인간은 위대하지 않다. 인간에게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지키고 살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데 어쩌자고 자유의지를 주었느냐. 빵만 있으면 아무 근심 없이 살 사람들인데. 도대체 몇 사람이나 빵 말고 하나님 말씀을 원하겠느냐.
이렇게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대심문관은 빵과 자유의 문제를 거론합니다. 빵 때문에 죄를 짓고 빵 때문에 슬퍼하는 자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말씀보다는 빵을 줘야 한다고 것이지요. 그 덕분에 지금 이만큼이나마 유지하고 있는데, 왜 다시 와서 빵이 아니라고 하며 우리를 방해하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가 빵, 곧 경제이니, 경제문제를 해결해주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1. 카라마조프 형제들 54p
"먹고 살기 바쁜데 살 판 났네"라고 음악페스티벌 개최에 대해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고흐는 왜 그토록 그림을 그렸을까요.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며 해바라기 연작을 그렸던 건 왜일까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존재한다면 예술 따위는 애진작에 사라졌어야 합니다. 인문도 마찬가지죠.
어쩌면 하느님이 빵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은 인간에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게 만들기 위해서일 지 모릅니다. 무료함을 느끼지 말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겠죠.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이렇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존재를 믿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걸지 모릅니다. 오병이어로 구원했다면서요. 하지만 이를 모든 사람에게 하지는 않았잖아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마케팅(?) 정도로 봐야 할 겁니다.
파리의 악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루이 14세가 만들어낸 베르사유의 궁전은 바로 이 골목길의 냄새로부터 도피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피할 수 있지만, 냄새만은 못 막았다는 것은 냄새가 우리의 영혼, 마음, 정신의 집결지이기 때문입니다. <말테의 수기> 첫 장면에 나오는 냄새 이야기는 바로 파리의 전통적인 냄새 이야기이고. 사람들이 살기 위해 파리에 모어들지만 죽으러 온 것 같다고 보는 것은 그들 추위를 감들고 있는 죽음의 냄새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절대로 피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프랑스 대혁명은 냄새의 혁명이었고, 인간은 누구도 그 냄새로 부터 도망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2.말테의 수기 120-121p
귀와 코는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감으면 됩니다. 내 의지가 전적으로 반영되어 있죠. 코와 귀는 아닙니다. 맡고 싶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아도 냄새는 나고 소리는 들립니다. 프랑스가 향수로 유명했던 건 거리의 악취 때문이라는 말이 있죠. 창문을 열고 "똥물이요~" 하며 오물을 거리로 뿌렸다고 합니다. 하수시설이 없었으니 그 오물들은 모두 센 강으로 모이게 된 겁니다. 파리 올림픽 때 센 강에서 수영을 한다고 논란이 있죠. 오랜 시간 축적된 오물을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이 걸릴텐데 말이죠.
이 작품의 마지막에 오는 것이 탕자 이야기입니다. 릴케는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를 독일어로 옮기기도 했지요. <말테의 수기>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탕자의 이야기에서 결론지어집니다. 말테의 탕자는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았던 탕자’입니다. 가족으로부터, 가족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집을 나가는 탕자입니다.
그 당시 마음속으로 그가 바란 것은 무관심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아침 들판에서 그런 순수한 기분에 잡히면 달리기 시작했다. 더 상쾌하게 아침을 느끼기 위해서, 숨쉬는 시간마저 갖지 않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281 쪽)
2.말테의 수기
탕자이야기 145p
릴케는 탕아 이야기를 통해 가족에게서 실존의 이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재산을 탕진하며 바깥에서 고난을 겪었던 둘째 아들의 귀가 소식에 아버지가 소를 잡아 잔치를 열죠. 아이는 뱃속에서 나오고 부터 독립적인 개체가 됩니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불안을 안고 나오는 존재입니다. 그 불안은 사춘기에 접어들 때 절정에 다다릅니다. 둘째 아들은 방황 속에서 무언갈 찾고자 한 것이죠. 그 끝은 가족의 품이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일으킨 것으로, 민중들이 호응을 하지 않은 탓에 참가자들이 몰살당하는 1832년의 그 사건은 '폭동'이라고 합니다. 위고는 이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폭동', '반란’, 그리고 '혁명'을 구분해 차이점을 자세히 설명합 니다.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점을 감안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소설이 아닙니다. 대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 여전히 환멸을 갖고 있는 이들, 지식인의 이야기가 헛된 것으로 여겨지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이루어진 사회에도 끼지 못하는 건달과 거지들이 일으킨 폭동을 그린 것입니다.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뒤에 2월 혁명이 되고, 다음에는 소련으로 건너가 불셰비키 혁명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산업혁명이 되어 미국으로 가고, 일부는 독일에 갔습니다.
4. 레미제라블 251p
빈자들의 성, 가난한 자들의 폭동
사회 구조가 전복되면 모든 게 달라질 줄 알았던 것은 모두 허상이었던 거죠.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광복을 맞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평민들의 삶이 나아졌나요? 한동안 고생해야 했습니다. 6.25 전쟁도 겪고 혼란 스러운 시기를 정리하느라 바빴습니다. 독재를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 전 대통령을 향해 민주화를 꿈꾸며 거리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뒤집는다고 세상이 즉각적으로 나아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의 연속이죠. 우리 업무도 마찬가지잖아요. 잠깐의 평화가 올 수는 있지만, 다시 일이 찾아옵니다.
소설을 재밌게 설명해주는 이어령 선생, 만약 카라마조프 형제들, 말테의 수기, 레 미제라블 등 소설을 읽기 전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본 뒤에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